에스페란토 도사 마영태 선생님의 글

미국의 아프칸 공습이 계속되고 있다. 한 쪽에서는 폭격을 하면서도 또 한 쪽에서는 굶주린 아프칸 국민을 위해 식량을 투하하는 이상한 전쟁이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미국 비행기가 투하한 그 구호식량 보따리에는 [Donaco de Usono]라는 글씨가 적혀있었다. 그건 영어도 페르시아어도 아닌 에스페란토 어(語)로서 [미국의 선물]이란 뜻이다. 적대관계인 두 나라의 언어 중 어느 나라 언어도 쓸 수 없어 그런 묘안을 짜낸 것이리라.

2000년 1월 27일자 미국의 USA Today지는 A religious belief in Esperanto (부제: Catholics, unity across Europe give language hope)라는 제목 하에 다음과 같은 기사를 소개하고 있다.

"2000년 5월 31일부터 6월 4일까지 함부르크에서 [독일가톨릭 포럼]이 개최된다. 그 포럼에는 5만 여명의 가톨릭 신도들이 모인 가운데 [Esperanto: The New Latin of The Chuch (에스페란토: 교회를 위한 새로운 라틴어)]라는 제목으로 Gyrogy Jakubinyi 대주교의 강론이 있을 예정이다"

또한 이 기사에서는, 에스페란토의 유래와 간략한 문법, 어휘 등을 소개하여 에스페란토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한편, 유럽연합은 한 달 후면 유로화를 통용하게 된다. 그 자존심 강한 파운드화(貨), 프랑화(貨), 마르크화(貨)도 유로화(貨) 앞에 깃발을 내렸다. 그 길만이 살길이요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써 유럽연합은 정치도, 통화도 완전한 통합을 이루게 되었고 이제 남은 문제는 [언어문제]뿐이다.

현재 11개의 공식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유럽연합(EU)에서는 금년을 [언어의 해]로 정하고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인 언어문제 해결을 위해 부심(腐心)하고 있다.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지난 5월 벨기에 브뤼셀에 있는 유럽의회 의사당에서 모의국회를 열었는데 대표적인 공용어의 후보로 영어와 에스페란토가 선정되었다. 두 후보 언어 모두 과반수의 지지는 얻지 못했으나, 참석자 대부분의 의견은 어느 언어든 특정 국가의 언어는 EU를 대표하는 공용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어서, 어느 민족어도 아닌 중립적인 에스페란토에 더욱 무게를 실어 주었다.

EU와 독일의 가톨릭계가 왜 이토록 에스페란토에 관심을 갖는 것일까? 이것은 결코 우연의 산물(産物)이 아니다. 올해로 114살이 되는 에스페란토가 그 동안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600대 1의 [국제어 경쟁]에서 생존한 결과에 대한 보상인 것이다. 아무리 영어가 [현실세계]와 [인터넷 가상세계]를 풍미(風靡)한다 해도 공용어가 될 수는 없다. 프랑스, 독일 등 EU 역내의 다른 모든 나라들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같은 이유로 프랑스어, 독일어 등 다른 국가들의 언어들도 유럽을 대표하는 공식언어는 결코 될 수 없을 것이다.


국제어의 역사

아주 먼 옛날 바벨탑 사건으로 이 세상의 언어가 혼란해진 이후, 온 인류가 다시 한가지 공통어를 가져보자는 염원은 이미 17 세기초부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에스페란토가 국제어로서의 최초의 시도는 아닌 것이다. 그 동안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 영국의 달가르노와 같은 유명한 학자들에 의하여 시도되었던 소위 국제어의 시안들만 해도 600여 가지에 달하고 있지만 자체의 불합리성으로 인하여 모두 사라지고 지금은 에스페란토만이 홀로 살아남아 국제어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간에 시도되었던 것들을 소개하면, 한 때 유럽지역에서 국제어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라틴어를 다시 일으키려는 운동, 상형문자를 도입하자는 주장, 숫자를 결합하여 어떤 의미를 부여해 사용하자는 의견, 심지어는 오선지 위에 음계를 이용하고자 했던 시도(試圖) 등이 있었는데, 이러한 노력들을 볼 때 우리는 온 인류가 공통의 중립언어를 얼마나 염원해 왔는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다.


에스페란토의 실제

* 정의: 에스페란토는 1887년에 폴란드의 안과의사이었던 자멘호프 (L.L.Zamenhof, 1859-1917) 박사에 의하여 창안, 반포된 인공어이다. 자멘호프가 살고 있었던 도시 비얄리토크에는 폴란드인, 유태인, 독일인, 러시아인 등 네 개의 종족이 함께 살고 있었는데, 다만 사용하는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이유로 종족간의 사이가 항상 좋지 못했으며, 그것이 소년 자멘호프로 하여금 언어의 다양성이 인간가족을 분리시키고 나아가 적대적인 관계까지 갖게 하는 주요한 원인이라고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자멘호프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중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언어만 있으면 적어도 그러한 분쟁은 종식될 수 있으리라는 꿈을 가지게 되었고, 그의 나이 28 세에 이 국제어 에스페란토를 세상에 발표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에스페란토는 그 말이 생기기 전에 먼저 만인평등의 정신과 세계평화의 정신이 그 속에 배태(胚胎)되어 있었다. 따라서 에스페란토 운동은 단순히 한 언어의 보급운동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세계평화 운동이며 에스페란토어는 이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요 도구인 것이다.

* 필요성: 이 지구상에는 수많은 민족이 살고 있고, 각 민족들은 고유한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통계에 의하면,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수는 3천여 종에 달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글자를 가지고 있는 언어는 500 여종, 문학적 전통을 가지고 인구 5000만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는 언어만도 17 개나 된다. 사실 우리나라의 고등교육기관에서 가르치고 있는 외국어의 수만 해도 영어, 불어, 독어, 일어, 중국어, 몽골어, 아랍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칼어, 그리고 동구권의 몇 개 언어까지 합하면 이십여 가지에 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이렇게 많은 언어를 다 알아야 지구상의 모든 민족들과 원만한 대화를 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극소수 특출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오늘의 현실은 이렇게 많은 언어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다. 즉, 각종 교통수단의 발달은 세계를 점점 좁게 만들었고, 지구상의 아무리 먼 곳이라도 하루 이내에 다 갈 수가 있게 되었다. 따라서 언어가 서로 다른 외국인과 자주 만날 기회가 생기다 보니 누구나 쉽게 배워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국제공통어를 피부로 느끼게 되었으며, 에스페란토는 바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하여 우리 곁에 와 있는 것이다.

* 문법: 에스페란토의 알파벳은 스물여덟 자로 되어 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영어의 알파벳 26자 중에서 Q, W, X, Y를 쓰지 않고, 대신 C, G, H, J, S, U에 삿갓을 붙여 한 글자씩 더 쓰고 있다: Ĉ, Ĝ, Ĵ, Ĥ, Ŝ, Ŭ.

문법적으로 볼 때 에스페란토의 특징은:
첫째, 쓰인 대로 읽기 때문에 발음기호가 따로 필요 없으며,
둘째, 한 단어에 가급적 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어 글이나 말을 이해하기 쉽고,
셋째, 각 품사에 따른 어미가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단어의 위치에 따른 품사의 변화가 없다. 예를 들면, 명사의 주격은 어미가 -o로 끝나고, 형용사는 -a로, 부사는 원래부사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e로 끝난다. 따라서 어미가 -o로 끝나는 단어는 문장의 어느 위치에 와도 언제나 주격명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에스페란토에는 목적격 어미 -n이 있는데, 이는 우리말의 [-을, -를]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 목적격 어미가 있는 단어는 문장의 어느 위치에 와도 목적어의 역할을 하게 된다.

* 교육: 1986년 6월에 발간된 "세계에스페란토 교육현황 자료집"에 의하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등 28 개국, 125 개 대학 및 고등교육기관에서 에스페란토를 정규과목으로 가르치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Cambridge 대학, Los Angeles 대학, San Francisco 대학 등 14 개 대학에서 학점을 인정하는 제 2 외국어로 채택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산동반도의 청도 시(市)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에스페란토 강좌를 하고 있는데 그 방송은 위성으로 중계하고 있어 중국 전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서도 수신할 수 있다. 그 방송으로 에스페란토를 배운 사람은 10만여 명에 이르며, 소정의 강좌를 마치고 자격시험에 합격한 사람만도 3만여 명에 달한다.
헝가리, 폴란드에서는 에스페란토 석,박사 과정도 있으며,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단국대학교에서 1985년부터 에스페란토를 교양과목으로 채택하고 있다.

* 방송·잡지: 잡지 세계에스페란토협회의 기관지인 Esperanto; Heroldo de Esperanto; Monato(시사문제); Kontakto; Revuo Orienta(일본); El popola inio(중국); Lanterno Azia(한국) 등 전 세계에 약 200여 종이 발행되고 있다. 방송 1922년에 영국의 런던방송국이 최초로 에스페란토 방송을 한 이래 오늘날에는 로마, 베른, 비엔나, 중국의 북경방송국 등 22개 방송국에서 매일 몇 시간씩 에스페란토 정규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특히 북경에서는 하루 네 차례에 걸쳐 30 분씩 에스페란토로 방송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수신이 가능하다. 그 방송의 내용은 중국의 문화, 역사, 산업, 관광, 에스페란토 운동에 관한 소식을 다루고 있다.
요즈음은 폴란드, 스페인, 쿠바, 중국, 캐나다, 콜롬비아, 스웨덴, 오스트리아, 리투아니아, 한국 등 여러나라에서 인터넷을 통해 방송을 하고 있다. (
http://esperanto-radio.net 참조)

* 여행·관광: 1980년 10월에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개최된 WTO, 즉 세계관광기구 회의에서 채택된 선언문에서는, 여행자들의 의사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하여 언어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에스페란토의 중차대함을 강조한다고 하였다. 한편, 에스페란토와 관련된 국제관광기구 중에는 Monda Turismo와 Pasporta Servo가 있는데, 이 기구들은 에스페란토 회원들의 해외여행을 돕기 위하여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있다.

* 펜팔·아마추어 햄: 전세계 100여 개국의 사람들과 서신 교환을 할 수 있으며, 또한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 정치·경제: 유럽연합(EU)은 현재 11 개 국어를 실무언어로 사용하고 있는데, 그 번역비와 그에 따른 제반 비가 엄청나 회의 참석자가 하는 연설 중, 한 단어마다 22 불의 경비가 소요된다고 한다. 그 동안 이 언어문제로 부심을 하고 있다가, 네덜란드의 한 전자회사에 용역을 주어 이 문제해결를 연구를 하도록 하였다. 중간 보고에 하면, 하나의 매개어, 즉 에스페란토를 도입하여 회의석상에서 활용하면 종전에 소요되었던 비용의 4분의 1밖에 안 든다는 결론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는데, 이 사실은 1988년 5월 1일자 Korea Times 지에도 [Scientists Find New Use for Esperanto (에스페란토의 새로운 활용방안을 모색하는 과학자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적이 있다.

유네스코는 1954년 12월에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에서 개최된 제 8차 총회의 결의문을 통해, 에스페란토가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지적교류분야와 여러 민족간의 친선도모를 위하여 이룩한 업적을 인정하고, 그 업적은 유네스코의 목적과 이상에 부합하는 것이며 따라서 세계에스페란토협회와 유네스코는 계속적으로 협력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후 이 두 기관은 자문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지난 85년,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에서 열린 총회에서는, 그 동안 에스페란토가 서로 다른 나라의 국민과 문화를 이해시키는 도구로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세계의 모든 국제단체들에게 유네스코 활동을 포함한 모든 정보를 알리는 수단으로 에스페란토의 활용을 연구·검토해줄 것을 권유한다고 하였다.

* 예술: 영화 - 1929년에 미국의 파라마운트 영화사가 30분짜리 영화를 제작한 이래 오늘날까지 200여 편이 제작되었는데, 그 중에는 독일에서 제작한 "내일부터 살겠다", 영국의 "탐정", "백치의 기쁨", 유고슬라비아의 "물의 정복", 덴마크의 "사람과 자연의 대결", 호주의 "원시의 아름다움" 등이 있다. 연극 - 1905년, 프랑스에서 열린 제 1회 세계에스페란토 대회에서, 몰리에르의 "마음에 없는 결혼"이 공연된 이래 입센의 "유령", 버나드쇼의 "난쟁이", 체홉의 "곰", 샤르뜨르의 "존경하는 P" 와 "출구는 없다"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형극 - 매년 크로아티아의 자그렙에서는 국제 인형극 페스티벌을 개최하는데 해마다 많은 나라가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고 있다.

* 조직: 그러면 에스페란토를 배우면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현재 에스페란토 운동의 본부인 세계에스페란토협회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 있고,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 등 107 개국에 지부를 두고 있으며 각국의 지부에는 지부 대표와 분야별 분과대표가 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든다면, 각 대도시별 대표가 있고 그 밑에 분과대표, 즉 관광분과, 언어분과, 의학분과, 보험, 우표수집, 상업 등 20여 개의 분과대표가 있다. 이와 같이 전세계 107 개국의 모든 지부에는 대표와 분과대표들을 위시하여 약 3000여 만 명의 회원들이 분포되어 있어, 에스페란토를 통한 상호교류, 즉 각종 정보의 교류, 서신교환, 우표, 그림엽서, 서적 등 수집활동에 있어서의 협조는 물론, 외국을 여행할 때 관광안내, 민박 등 편의제공을 하고 있어 인류는 한 언어를 쓰는 한 가족이라는 말을 실감케 하고 있다.

*세계에스페란토협회
http://www.uea.org
한국에스페란토협회
http://http://soback.kornet.net/~keast

결론

일찍이 세종대왕은 언어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백성들이 제 뜻을 펴고싶어도 펴지 못함을 불쌍히 여겨 훈민정음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문이라고 무시하고 한자를 계속 사용했다. 그 후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강제로 일본어를 배워야 했고 또 일어를 잘 하는 사람이 출세의 가도를 달렸다. 해방 후, 미군정 시대에 들어서면서 맥아더 사령부는 포고령 제 1호로 한반도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선포했다. 그리고 50년이 흐른 지금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고 주장하는 [맥아더의 후예]들이 있다.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한자(漢子), 일어(日語), 영어(英語)의 지배를 받아온 우리나라는 아직도 그 말들의 잔재가 뿌리 깊게 남아있어 우리말은 순수성을 잃었고, 국어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개탄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에스페란토는 일민족이언어주의(一民族二言語主義)를 표방한다. 모든 민족의 언어를 존중하고 국제관계에서는 만인평등의 공통어인 에스페란토를 사용하자는 주의이다. 우리도 이제 에스페란토에 관심을 갖자. 우리만 관심을 갖자는 게 아니다. 유럽연합에서도, 가톨릭계에서도, 미국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데 우리만 뒤쳐질 수는 없지 않은가?

(조선일보 인터넷페이지에서 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