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보며

 

  대학 1학년 때인 1973년. 2학기가 시작할 무렵 서울대 공릉동 캠퍼스에서 대규모의 에스페란토 전시회가 있었다. 포스터와 함께 많은 책이 전시되었는데 그 책들이 모두 에스페란토로 쓰여졌다는 사실에 깊은 인상을 받고 강습을 신청하였다. 이때 같이 강습을 신청한 학생이 무려 200명이 넘었다. 그러나 곧 이어 유신반대 데모가 캠퍼스를 휩쓸면서 학교는 문을 닫고 강습회는 아쉽게 무산되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방학때 집으로 엽서 한 장이 날아들었다. 어느 영어학원에서 에스페란토 강습회를 한다는 안내문이었다. 특별한 방학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수강을 하기로 결정하고 학원을 찾아가 등록을 하였다. 당시 강습료가 2,500원으로 기억한다. 개강일에 가보니 학생은 나 하나. 그리고 내가 최초의 유료강습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강사는 당시 한국에스페란토청년연합회 회장인 이용철씨로 서울대 농대에 재학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용철선생님이 휴강일 때는 전경덕선생님도 가끔 가르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전시회와 강습회 모두 청년연합회에서 주최하는 것이었다.

  열심히 강습에 임한 덕분에 2주만에 초급을 마치고 2주 동안 회화를 배웠다. 그리고 곧 이어 국제대(지금의 서경대)에서 열린 중급 강습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실력을 키워 나갔다. 그때 배운 책은 바보이반(Ivan La Malsagxulo)이라고 기억된다. 그리고 쉬운 책을 찾아가며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책을 구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외국에 송금하는 것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자하여 복사한 책도 많이 있었다.

  중급을 배우면서 같이 공부한 김원길씨, 고정대씨와 Rondo Folioj를 결성하고 이용철선생님의 지도로 고급과정을 거쳤다. 문법 구조도 이때 배웠다. 그리고 수시로 우리끼리도 모였는데 이때는 에스페란토로만 얘기를 하였다. 지금 나의 회화실력은 그때의 수준이다. 김원길씨는 이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에서 활발히 운동을 하였다. 그의 딸인 Mina는 denaska esperantisto이다.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에스페란토를 배워 모국어처럼 말을 하니 부럽기 짝이 없다. Mina의 남동생인 Emil도 역시 denaskulo이다.

  다시 초기로 돌아가서, 에스페란토에 푹 빠지면서 책을 읽으며 밤을 샌 적도 많이 있다. 의외로 재미있는 책들이 많이 있었고, 또한 배우면서 에스페란토 사상에도 점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에스페란토를 위해 일생을 바친 선배들을 존경하며, 어느새 그들의 노력이 헛되이 되지 않도록 하여야겠다는 다짐도 할 정도로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