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금요일

Thou seest we are not all alone unhappy:

The wide and universal theater

Presents more woeful pageants than the scene

Wherein we play in. <As You Like it, II vii, 136>

불행한 것은 우리들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계라는 이 넓은 무대에서는 우리들이 지금 연기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비참한 연극이 공연되고 있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첫 민들레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겨울이 끝난 자리에서

소박하고 신선하게 아름답게 솟아나서

유행, 사업, 정치, 이 모든 인공품일랑 일찍이 없었든 양, 아랑곳 없이,

수풀 소복히 가린 양지 바른 모서리에 피어나

동트는 새벽처럼 순진하게, 금빛으로, 고요히

새봄의 첫 민들레는 이제 믿음직한 그 얼굴을 선보인다.

 


 오늘의 맹자(孟子)

三里之城, 七里之郭, 環而攻之而不勝. 夫環而攻之, 必有得天時者矣; 然而不勝者, 是天時不如地利也. 

3리의 성과 7리의 외곽[임; 작은 성을 말함)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도 승리하지 못하였다고 하자.

이런 성을 포위하고 공격한다는 것은 반드시 하늘이 준 기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하늘이 준 기회가 지리적이 이점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 히파르코스(Hipparchos BC190?∼BC125?)는 월식을 이용하여 지구와 달의 크기가 4:1임을 증명하였고, 또 월식현상을 근거로 지구와 달의 거리가 384,000km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이 수치는 약 1% 정도의 오차밖에 없는 아주 정확한 측정 및 계산치이며 이것 역시 천체공간의 일정 거리를 기하학적 원리를 이용하여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음을 보여 준 예이다.

<역사와 함께하는 과학 이야기, 주완철, 주광석,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0>

    

    

4월 4일 월요일

 밥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엄청난 돈을 치루고 무기를 사게 만드는 세계의 열강들,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켜 파괴를 일삼는 그들이 이제 인류 앞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262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1980년 5월, 아프리카 방문시>


 

평온한 날의 기도

 

                                                                  박 목 월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이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양지 바른 창가에 앉아

인간도 한 포기의

화초로 화하는

이 구김살 없이 행복한 시간

주여

이런 시간 속에서도

당신은 함께 계시고

그 자애로우심과 미소지으심으로

우리를 충만하게 해 주시는

은총을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평온한 날은 평온한 마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게 하시고

강물 같이 충만한 마음으로

주님을 생각하게 하십시오.

순탄하게 시간을 노젓는

오늘의 평온 속에서

주여

고르게 흐르는 물길을 따라

당신의 나라로 향하게 하십시오.

3월의 그 화창한 날씨 같은 마음 속에도

맑고 푸른 신앙의 수심(水深)이 내리게 하시고,

온 천지의 가지란 가지마다

온 들의 푸성귀마다

움이 트고 싹이 돋아나듯

믿음의 새 움이 돋아나게 하여 주십시오.

 


 오늘의 맹자(孟子)

城非不高也, 池非不深也, 兵革非不堅利也, 米粟非不多也; 委而去之, 是地利不如人和也. 

성도 높고, 성을 두르는 못도 깊고, 군대의 장비도 견고하고 예리하며, 군량도 충분하지만 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수가 있다.

지리의 이점이 인화만 못하기 때문이다.


 *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 기원전 323년에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그의 부하들이 서로 패권 다툼을 벌였다. 기원전 306년에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인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이집트의 지배를 굳건하게 하였다. 기원전 276년에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뒤를 이었다. 이 왕이 알렉산드리아의 박물관과 도서관을 건립하였다.

- 프톨레마이오스 2세는 귀중한 필사본을 손에 넣고 번역하였으며, 도서 구입 관리들을 지중해에 파견하여 귀중한 책들을 수집하였다. 심지어 이집트에 입국한 여행자가 책을 소지하고 있었다면 출국할 때 이를 남겨놓고 떠나야만 했을 정도이다. 이 책은 도서관의 서기들이 복사하여, 원본은 보관시키고 사본만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3세(이집트에서 처음으로 윤년을 선포한 왕)는 한층 더 광적이었다. 그는 아테네로부터 그리스의 유명한 극작가들의 원본을 빌려 복사한 후 사본만 돌려보냈다. 그 결과 원본 반환의 담보로 지불했던 저당금을 기꺼이 몰수당하기도 했다.

- 시저가 이끄는 무뢰한들이 침략하기 전(BC 48)에 이 도서관은 75만 권 가까이 되는 장서(이 장서는 두루마리로 되어 있으며, 한 두루마리는 전형적으로 길이가 4.5~6 미터이며, 현대 영문자로 1만~2만 단어가 있는 분량이다)를 보유하게 되었다.

- 더욱 더 인상적인 것은 박물관이었다. 박물관은 사실상 대학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 3세는 당시 고명한 학자들과 계약을 맺어 이 대학에서 가르치기로 했다. 이곳은 곧 세계 과학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후 웬만한 지식인들 중 알렉산드리아에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임성삼; 우리가 그리스 문화라고 알고 있는 것의 대부분은 지금의 터키 해안 지역에서 꽃핀 것과 이 알렉산드리아의 것입니다.]

- 기원전 48년 시저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했을 때, 매국녀 클레오파트라 여왕은 그에게 자신의 침대만 바친 것이 아니라 도서관도 바쳤다. 시저와 같은 악당이 어떻게 그 도서관을 받았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는 마음대로 상당량의 두루마리 책자를 로마로 보냈다. 그러자 알렉산드리아인들은 캠퍼스 폭동의 초기 형태로 시저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기를 들었다. 이는 로마군의 무력으로 진압되었고, 그 와중에 선적된 서적과 도서관에 남아 있던 서적들이 불에 탔다.

- 클레오파트라가 다음 로마군 지도자인 안토니우스와 친하게 되자, 안토니우스는 로마인의 아량을 발휘하여 선물을 하였다. 페르가몬에서 20만 권(roll)의 도서를 약탈하여 클레오파트라에게 주었다.

- 서기 272년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가 이집트의 반란을 진압할 때 다시 파괴되고, 295년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또 다른 반란을 진압할 때 다시 한번 파괴된다.

- 391년에는 광신적인 주교 테오필루스가 이끄는 기독교 폭도들이 도서가 소장된 세라피스 사원을 파괴한다. 또 다른 광적인 주교 시릴은 기독교 폭도들은 선동하여 415년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인 히파티아를 두들겨 패서 죽였다. 그녀의 죽음은 수학 지식의 중심지인 알렉산드리아의 최후를 의미한다.

- 646년 아랍이 이 도시를 점령하자, 아랍 장군은 칼리프에게 도서관의 책들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문의하였다. 회답은 “만일 그 책들이 <코란>과 일치하면 불필요한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해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책들은 불태워졌다.

[임성삼; 646년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 거의 옳은 것 같음]

<π의 역사, 페트르 베크만 지음, 박영훈 옮김, 실천문학사, 1994>

 

 

4월 5일 화요일

No ceremony that to great ones 'longs,

Nor the king's crown, nor the deputed sword,

The marshal's truncheon, nor the judge's robe,

Become them with one hall so good a grace

As mercy does. <Measure for Measure, II ii, 59>

대관대작의 어떤 훈장도, 장식도,

임금님의 왕관도, 지위를 자랑하는 대검(帶劍)도,

대원수의 지휘봉도, 법관의 정복도,

자비만큼 그토록 우아할 수는 없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완화삼(玩花衫) 

 - 목월(木月)에게

                                       조지훈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그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리.

 

나그네 긴 소메 꽃잎에 젖어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오늘의 맹자(孟子)

 

故曰: 域民不以封疆之界, 固國不以山谿之險, 威天下不以兵革之利. 得道者多助, 失道者寡助. 寡助之至, 親戚畔之; 多助之至, 天下順之.

옛말에

"백성들이 딴 나라로 도망하는 것을 막되 국경의 경계에 의존하지 말라.

나라를 지키는 데 산천의 험난한 것에 의지하지 말라.

천하를 누르는 데 무기의 예리함에 의존하지 말라."

하였다

도를 얻은 사람은 돕는 사람이 많고, 도를 잃은 자는 도와주는 사람이 적다. 극단인 경우는 친척까지도 배반한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으면 천하의 백성들도 귀순한다.

 

以天下之所順, 攻親戚之所畔; 故君子有不戰, 戰必勝矣. 」 

천하의 백성들이 귀순하면 배반한 친척들을 공격한다. 그런 까닭에 군자는 싸움을 않고자 하지만, 싸움을 하면 반드시 승리한다.”


 * 종이의 발명; 채륜(蔡倫, ?~121, 거북 채) 105년

- 종이는 105년경에 중국 후한(後漢)의 채륜(蔡倫)이 처음 만들었다.

돌절구에 비단 조각, 나무껍질, 그물조각 등 섬유성 물질을 모아 물에 불린다음 두드려 섬유로 분리하였다. 여기에 적당한 접착제를 가한 후 대나무 발에 걸러 물을 뺀다음 말린다. 이 공정은 오늘날 까지 변하지 않았다.

- 후한의 2대 황제인 명제 말년에 출사(出仕). 종이를 발명한 후부터 황제의 총애를 받아 파격적으로 승진하여 후(侯)가 되었다.

 종이의 발명 이후 중국의 문화상 업적은 매우 발전하게 되었으며, 특히 7세기와 8세기의 중국의 문명은 지구상 최선두에 있었다. 이 문명의 우월성은 적어도 15세기까지는 유지되었다.

- 그러나 종이는 채륜이 출생하기 전에 이미 광활한 중국 땅에서 사용되고 있었음이 증명되었다.

 서한의 역사를 기술한 <한서>에는 서한 원년(元延, 끌 연)에 발생한 궁정 살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데, 살인범이 사용한 두 알의 독약은 모두 ‘혁제(赫蹄)’라고 불리는 얇은 종이 조각에 싸여 있었다고 한다. 1934년 위그루족의 신장 봉수 유적지에서 10X4센티미터의 종이쪽지가 발견되었는데, 동시에 발견된 목간은 기원전 49년의 것이었다. 또한 1957년 산시 시안 부근의 고분에서 발견된 종이는 서한 무제(기원전 141~87년) 때를 넘어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 종이 조각은 ‘파교지’라고 불리며, 파교지는 채륜이 생활했던 연대보다 2, 3백 년 앞서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증거는 종이가 이미 서한 초기에 중국 땅에 출현했음을 증명하고 있다.

 채륜이 있기 전의 종이 제조에 사용된 원료들은 삼베 조각이나 낡은 어망 따위였다. 이런 재료는 생산량이 적어 종이 생산의 확대를 제약하는 요소가 되었다. 채륜의 공로는 바로 원래의 제조 원료를 나무 껍질이나 삼베의 생 섬유로 대체하자고 제안한 데 있다.

 대마와 황마, 아마는 중국 각지에서 광범위하게 재배되고 있다. 이미 낡고 찢어진 삼베를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던 상황에서 더 쉽게 구할 수 있는 마의 생섬유를 사용하여 종이를 제조하겠다는 것은 쉽게 발상해 낼 수 있는 일이었다.

 채후의 공향 후난 레이양은 닥나무 재배 중심지역이었고 그 지역사람들은 그 섬유로 옷을 해 입었다. 그는 이 천의 원료를 종이 제조의 원료로 바꾸었다.

<손에잡히는 중국역사의 수수께끼, 왕웨이 외, 박점옥 옮김, 대산인문과학총서 4, 2001>

 

- 종이의 전파

751년에는 중앙 아시아, 793년에는 바그다드에 전파되었으며,

900년 무렵에는 이집트에, 11 세기에는 지중해 연안까지 전파되었다.

13 세기 후반에는 이탈리아에, 1189년에는 프랑스에 제지 공장이 건설되었다.

1390년 독일에 건설되었다. 15, 16세기에는 유럽 여러 지역에 종이공장이 있었다.

[임성삼; 751년에 제지법이 중앙 아시아로 퍼지게 된 것은 우리 고선지 장군에 의한 것입니다.

-참고; 중세유럽에서는 양피지에 글을 쓰고, 그것을 두루마리처럼 말아서 책을 만들었다. 가축 한 마리로 품질 좋은 양피지 4장 정도 만들 수 있으므로,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보통 양이나 송아지 30마리가 필요했다. 성경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200마리에서 300마리의 양이나 송아지의 가죽이 필요했다.

 

- 고선지 高仙芝   ?~755.

고구려 유민 출신의 당나라 장군.

당나라의 서역 정벌에서 뛰어난 군사전략으로 전승을 거두어 명성을 떨쳤다.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 사진교장(四鎭校將)이었던 아버지 사계(舍鷄)를 따라 당나라 안서(安西)에 가서 음보(蔭補)로 유격장군(遊擊將軍)에 등용되고, 20세 때 장군에 올랐다. 740년경 병력 2,000명을 이끌고 톈산[天山] 산맥 서쪽의 달해부(達奚部)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安西副都護)가 되고, 이어 사진도지병마사(四鎭都知兵馬使)에 올랐다. 747년과 750년 1, 2차 서역원정에서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지배를 위협하던 토번족과 그의 동맹국인 소발률국(小勃律國) 및 타슈켄트 지방의 석국(石國) 등 서역의 여러 나라를 정벌하여 명성을 떨쳤다. 이 공으로 홍려경어사중승(鴻卿御史中丞), 특진겸좌금오대장군동정원(特進兼左金吾大將軍同正員)을 거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가 되었다.

 

 751년 서역 각국과 사라센의 연합군이 석국 정벌을 보복하려고 쳐들어오자, 다시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탈라스(Talas) 대평원으로 제3차 원정에 출전했다. 그러나 당나라와 동맹을 가장한 카르룩[葛邏祿] 군에 의해 배후에서 공격을 받고 섬멸당해 후퇴했다. 귀국 후 하서절도사로 전임되어 우우임군대장군(右羽林軍大將軍)에 임명된 후, 755년 밀운군공(密雲郡公)에 봉해졌다. 그해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토적부원수(討賊副元帥)로 출전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방어 담당지역인 섬주(陝州)를 떠나 동관으로 이동한 사실을 감군(監軍) 변영성(邊令誠)이 현종에게 과장하여 모함해 진중에서 참형(斬刑)되었다. 서역제국의 정벌에서 보여준 그의 뛰어난 군사전략은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하여 높이 평가되었고, 탈라스 전투에서 아라비아의 포로가 된 중국인에 의해 제지법이 아라비아에 전파되었다.]

     

    

     

4월 6일 수요일

The quality of mercy is not strained;

It droppeth as the gentle rain from heaven

Upon the place beneath. It is twice blest;

It blesseth him that gives and him that takes. <The Merchant of Venice, IV i, 183>

자비는 성격상 강요될 수 없는 것이다.

자비는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적시는 은혜로운 비와도 같다.

그 축복은 이중으로 내린다.

자비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을 모두 축복하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나그네 

-술 익은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지훈(芝薰)

                                                     박목월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오늘의 맹자(孟子)

 2. 맹자와 왕

  孟子將朝王, 王使人來曰:  「寡人如就見者也, 有寒疾, 不可以風. 朝將視朝, 不識可使寡人得見乎? 」 對曰:  「不幸而有疾, 不能造朝. 」 

맹자가 왕을 찾아보려던 때, 왕의 사신이 와서 말을 전했다.

"과인이 찾아가 보려고 했으나 마침 감기가 걸려[유한질 有寒疾] 바람을 쬘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 나와 준다면 만나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과인이 만나볼 수 있는지 알려주기 바랍니다."

[조정에 가려던] 맹자가 말했다.

"불행히도 병이 나서 갈 수가 없습니다."

明 「昔者辭以病, 今日弔, 或者不可乎? 」 曰: 昔者疾, 今日愈, 如之何不弔? 

그 다음 날 맹자는 '동곽씨'에게 문상을 떠나려 했다. 공손추가 말했다.

"어제는 병이 났다고 [왕이 부르는 것을] 사양하셨습니다. 오늘 문상가시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닙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어제 아프던 병이 오늘 나았으니, 어찌 문상을 못 갈 이유가 있느냐?"

[임성삼의 주(註); 논어에 공자님도 이와 비슷한 일을 하신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절을 확립시킨 공자, 맹자가 모두 이런 일을 하였습니다. 예절보다 한 사람의 자존심이 더 높은 가치가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맹자보다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이런 기개 있는 행동을 한 사람을 거의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 말의 등자

-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에는 등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서에 의하면 당시 사람들은 안정 없이 말을 타거나 두꺼운 천에 가죽띠를 감아서 안장으로 대용했다.

- 인류 최초의 등자는 2세기 경 중국 조각작품에서 등장한다. 3세기경부터 중국에서는 오늘날 서양에서 쓰는 금속 등자를 발명했다.

 중앙아시아를 거친 유목민들이 6세기경 헝가리에 정착하면서 등자가 전해지기 시작했고, 9세기에 비잔틴으로, 11세기에 바이킹이 등자를 사용하면서 유럽 전역에 퍼졌다.

<세계의 최초들 2, 피에르 제르마 지음, 김혜경 옮김, 하늘연못, 2000> 

[임성삼; 동양보다 거의 천 년 뒤진 것입니다.]

 

 

4월 7일 목요일

Nothing emboldens sin so much as mercy. <Timon of Althens, III v, 3>

자비만큼 죄인을 대담하게 만드는 것은 없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산도화(山桃花)

                                                        박목월

 

산은

구하산

보랏빛 석산

 

산도화

두어 송이

소이 버는데

 

봄눈 녹아 흐르는

옥 같은

물에

 

사슴은

암사슴

발을 씻는다

 

 


 오늘의 맹자(孟子)

 2. 이윤과 관중

王使人問疾, 醫來. 孟仲子對曰:  「昔者有王命, 有采薪之憂, 不能造朝. 今病小愈, 趨造於朝, 我不識能至否乎? 」 使數人要於路, 曰:  「請必無歸, 而造於朝! 」 

왕이 사람을 시켜 문병을 하고, 의사도 보내왔다. 맹중자가 상대하여 말했다.

“어제 조회에 들라는 명령이 있었으나 병으로 가 뵙지 못했었습니다. 오늘 조금 병이 나아서 급히 조회에 드시고자 집을 나가셨는데, 과연 잘 도착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는 몇 사람을 시켜 맹자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말하게 했다.

“집으로 오시지 말고, 곧 대궐로 드십시오.”

 

不得已而之景丑氏宿焉. 

景子曰:  「內則父子, 外則君臣, 人之大倫也. 父子主恩, 君臣主敬. 丑見王之敬子也, 未見所以敬王也. 」

:  「惡! 是何言也! 齊人無以仁義與王言者, 豈以仁義爲不美也?

其心曰 是何足與言仁義也 云爾,

則不敬莫大乎是. 

我非堯舜之道, 不敢以陳於王前, 故齊人莫如我敬王也. 」 

맹자는 부득이 경추씨를 찾아가 머물게 되었다.

 경자가 말했다.

 “집안에서는 아비와 자식, 밖에서는 임금과 신하가 인륜(人倫) 중에 가장 큰 것입니다. 부자 사이는 은혜를 위주로 삼고 임금과 신하 사이는 존경하는 것을 위주로 합니다. 내가 보는 바로는 임금께서는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신데, 선생님께서는 아무래도 임금을 존경하고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맹자가 말했다.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십니까? 제나라 사람은 임금과 더불어 인과 의로써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이 어찌 인의를 아름답지 못하다고 여기기 때문이겠습니까?

 그 마음으로는 ‘인과 의로 말하기에 부족하다’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보다 불경이 더 클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나는 요순의 도(道)가 아니면 왕 앞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제나라 사람들은 나보다 왕을 공경하지 않는 것입니다.”


 * 150년 경 사혈(瀉血)법 발견; 갈렌 <실수에 관한 진실, 허시 골드버그, 차미례 옮김, 중앙 M & B, 1997> 

 의사가 환자의 체액의 균형을 되찾아 줄 수 있는 방법은 인체내의 “부패한 체액”을 제거하기 위해 피를 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방법은 쇠약해진 인체를 더욱 약하게 함으로써 죽음을 재촉했을 뿐이나, 서양에서는 1500년이나 널리 사용되었다.

 어떤 의학사 책에는 “의료업의 혜택을 받기에는 너무 가난했던 농민들이나 도시 빈민들은 정말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들은 병을 고치는데 주로 마술에 의존했다. 이 마술은 권위있는 의술보다 훨씬 덜 해로운 경우가 많았다”고 써있다.

[참고; 설사(泄瀉, 샐 설, 쏟을 사)]

 

- 1685년 영국의 찰스 2세가 신장병에 걸려 쓰러져서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낮에는 열 두명, 밤에는 여섯 명의 의사들이 치료를 담당했다. 우선 의사들은 당시 가장 즐겨 사용하던 치료법인 피 빼기를 시작했다. 양쪽 어깨에 피를 받는 유리잔을 대고 피부를 칼로 절개한 다음 혈관에서 피를 뽑아냈다. 그 후 왕의 머리털을 깎아내고 머리 가죽에 물집이 생기게 하는 고약을 붙이고, 송진과 비둘기 똥 반죽을 양쪽 발바닥에 붙였다. 그 다음 지독한 냄새가 나는 살충제용 풀을 콧구멍에 불어 넣어 재채기를 많이 하여 뇌 속에 들어 있는 체액이 흘러나오게 했다. 그 다음 안티몬과 황산 아연을 먹여 구토를 하게 하여 뱃속을 청소했다. 창자를 청소하기 위해 설사약을 사용했고, 경련을 멈추기 위해 인간의 두개골로 담근 술을 먹였다. 이 기간에 진정제, 설사약, 박하, 분석(糞石) 등을 왕에게 먹였다. 왕은 잠을 자거나 말을 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닷새째 되던 날, 의사들은 왕에게서 340g의 피를 더 뽑아내고 강심제를 더 먹였다. 그날 정오쯤 찰스 2세는 죽었다.

 

- 1799년 12월 12일 조지 워싱턴(1732∼1799)은 진눈개비가 내리는 데 매일 일과인 승마를 하였다. 다섯 시간 만에 돌아와 만찬이 끝날 때까지 완전히 젖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있었다.

다음 날 일어나니 편도선이 부어 있었다. 눈이 계속 내리는 데 장거리 산책을 하였다.

12월 14일 후두염 증상이 보였다. 그날 하루 동안 세 명의 의사가 돌보는 가운데 워싱턴은 네 번이나 피를 뽑았다. 밤 10시 쯤 그는 마지막 한 마디 ‘좋아’를 속삭이고 숨을 거두었다.

[임성삼; 나이는 들었으나 상당히 건강한 상태였다.]

 

- 바이런(1788-1824)은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기 위한 전쟁에 참가하였다. 그는 말라리아에 전염되었으며, 의사들은 치료법으로 피를 빼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다. 바이런은 이 치료에 반대했으나, 의사들이 ‘결과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며 자기들의 주장을 강요했다. 메인이 쓴 바이런의 전기에 따르면 1824년 4월 16일 이 시인은 두 팔을 던지며 화가나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어서 마음대로 해.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빌어먹을 백정의 떼거리야. 어서 마음대로 실컷 피를 뽑으라구. 하지만 이번만이야!”

 이날의 피 빼기는 효과가 없었다. 다음날인 17일 의사들은 다시 피를 두 번 뺐다. 두 번 다 바이런은 정신을 잃었다. 어떤 기록에 따르면 이 시인은 결국 피를 1800g이나 뺐다고 한다. 4월 19일, 바이런은 36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4월 8일 금요일

Sweet mercy is nobility's true badge. <Titus Andronicus, I i, 119>

아름다운 자비심은 고결한 인격의 진정한 표상이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청노루

                                   박목월

 

머언 산 靑雲寺

낡은 기와집

 

山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가는 열두 구비를

 

靑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오늘의 맹자(孟子)

 

景子曰:  「否, 非此之謂也.

禮曰:  父召, 無諾; 君命召, 不俟駕. 固將朝也, 聞王命而遂不果, 宜與夫禮若不相似然. 」 

경자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것을 말씀드린 것이 아닙니다.

예기(禮記)에 보면 '아버지가 부르시면 대답하고 곧 가 뵙고, 임금이 명령으로 부르면 수레에 말을 달기를 기다리지 말고 달려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원래 조회에 드실 계획이었는데, 임금의 명을 듣고 수행하지 않았으니, 아마 예절과 다른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임성삼의 주(註); 말한 사람은 이 나라의 높은 관리입니다. 정확하게 맹자의 행동을 알고, 추궁하고 있습니다.

 공자도 왕이 부르면 먼저 걸어서 출발하고, 수레에 말을 맨 마부가 따라오면 그 마차를 타고 계속 갔었다고 논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豈謂是與? 曾子曰:  晉楚之富, 不可及也. 彼以其富, 我以吾仁; 彼以其爵, 我以吾義, 吾何慊乎哉? 夫豈不義而曾子言之? 是或一道也.

天下有達尊三: 爵一, 齒一, 德一.

朝廷莫如爵, 鄕黨莫如齒, 輔世民莫如德.

惡得有其一, 以慢其二哉? 

맹자가 말했다.

"어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소? 증자가 말하기를

'진나라와 초나라의 부(富) 내가 미치지 못한다.

그들이 부(富)를 자랑하면, 나는 인(仁)을 자랑한다.

그들이 벼슬을 자랑하면, 나는 의(義)를 자랑으로 한다.

내가 무엇을 꺼리어 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증자가 어찌 의롭지 않은 것을 말했겠습니까? 이것도 하나의 도(道)입니다.

 천하에 공통적으로 존경받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지위와 나이와 덕(德)입니다.

조정에서는 벼슬만한 것이 없고, 동네에서는 나이만한 것이 없고,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들의 낫게 만드는 데는 덕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 하나만 가지고 나머지 둘을 태만히 할 수 있겠습니까?


 * 기원 원년 부근인 로마 제정 초 로마의 화폐는 순도와 무게를 매우 엄중하게 지켰으므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래서 멀리 인도와 중국에서까지 로마의 은화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180년대 이후 로마은화의 순도는 차츰 떨어지기 시작하여 260년대에 오면 그 순도가 거의 1~2%밖에 되지 않았다. 황제들은 은화의 순도를 떨어뜨리면서, 은화의 모양은 화려하고 멋지게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결국 260년대에는 은행조차도 문을 닫고, 국가가 발행한 화폐의 교환을 거부하였다.

<역사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다, 정기문, 신서원, 2000>

   

   

    

  

4월 11일 월요일

Pray you now, forget and forgive. <King Lear, IV vii, 84>

제발 잊고 용서하라.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신춘음(新春吟) 

 박 목 월

 

하루종일

열리우고 닫히는 문 옆에

말이 없는

탁자의 수선 같은 것

그것을 생각한다.

혹은 텅 빈 뜰을

거리에 내리는 눈을

치렁치렁한 성좌를.

그리고

눈 위로 부는 바람과

조석으로 달라지는 바람의 향기를.

들뜨지 말자.

떠들지 말자.

덤비지 말자.

조용히 풀 한 포기.

말 한마디를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을 생각하다.

우리 생활이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또한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야

비로소 의식에 궁하지 않는 것이

인간에 주어진 형벌일지라도

조급히 굴지 말자.

설레지 말자.

항상 마음을 비어두고

가난 속에 스민 은혜와

고뇌 안에 싹트는 구원과

절망 속에 넘실대는 희망을

한 팔로 싸안고

소란한 시대일수록

총명한 눈을 뜨고

조용하자.

진실로

인간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닐진대

무엇에 우리의 생활이

구속되랴.

문득 검은 머리털에

한 오리 백발을 발견하듯

그런 마음으로

탁자의 수선 같은 것을

코에 어려오는 눈 바람 내음새 같은 것을

유심히 생각하자.

자연스러운 삶은

무심히 퉁겨진 주판알이

일정한 수치를 지니듯 한 것.

생의 보람을

계산하지 말자.

 


 오늘의 맹자(孟子)

 

故將大有爲之君, 必有所不召之臣.

欲有謀焉, 則就之.

其尊德樂道, 不如是不足與有爲也. 

장차 큰 일을 하려는 임금은, 앉아서 부르지 않고 가서 만나야 하는 신하가 반드시 있습니다.

왕이 의논을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합니다.

덕을 존중하고 도를 즐기기가 이와 같지 않으면 더불어 일하기가 부족합니다.

 

故湯之於伊尹, 學焉而後臣之, 故不勞而王;

桓公之於管仲, 學焉而後臣之, 故不勞而霸. 

그러므로 [은나라의] 탕왕은 이윤에게 가르침을 받고 후에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러기에 탕왕은 힘들이지 않고 왕이 되었습니다.

제나라의 환공도 관중에게 가르침을 받은 뒤 신하로 삼았습니다. 그러기에 힘 안들이고 패자가 되었습니다.

 


 * 오늘 동아일보; 국방부 정밀 직격탄(JDAM, joint direct attack munition) 1000발 도입 결정

 올해 국방백서에 의하면 북한은 야포 1만3500여문을 가지고 있으며, 이 중 170 mm 자주포와 240 mm 방사포 등 3000여 문을 휴전선 인근에 배치하고 있다. 이들 야포는 사거리가 50~60 km로 개전 초 한미군 핵심 시설과 수도권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으로 군사전문가들은 우려하고 있다.

 이번 도입 예정인 정밀 직격탄은 재래식 공중 투하 폭탄에 위치확인 시스템(GPS)을 부착, 공중 발사 후 목표물 좌표 위성신호를 통해 추적하여 파괴한다.

 길이는 3~4 m, 무게는 456~952 kg, 최대사거리 24 km, 오차범위는 3~13m이다. 제작사는 미국 보잉사이며 한 발당 가격은 약 3만 달러(약 3천만 원)이다. 폭격기에서 동시에 3, 4 발이 발사되어 각각 다른 목표를 타격할 수 있고, 악천후와 야간에도 정밀 타격이 가능하다.

 

 * 책 파괴와 과학의 박해

- 391년에는 광신적인 주교 테오필루스가 이끄는 기독교 폭도들이 도서가 소장된 세라피스 사원을 파괴했다.

- 373년 기독교인인 로마 황제 발렌스는 비기독교인 서적을 모두 불태워 버리도록 명령했다.

- 1109년 십자군은 트리폴리를 점령했고, 십자군을 상징하는 대학살의 향연을 즐긴 후 모슬렘의 책 10만 권 이상을 불태워 버렸다.

- 1204년 4차 십자군은 같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그때까지 남아 있던 고전 작품을 모두 불태웠다. 이는 역사상 가장 큰 손실의 하나로 여겨진다.

- 1480년 스페인 수학자 발메스가 4차 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혐의로 화형에 처해졌다. 교황청 종교재판관의 입장은 이와 같은 해법은 인간의 이해로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 신의 뜻이라는 점이다.

- 1560년 유카탄의 디에고 주교가 마야 원주민의 모든 서적을 불태웠다. [임성삼; 이 결과 우리는 마야의 문명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 1600년 조르디아노 브루노가 지구는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주장을 하여 산 채로 화형을 당했다.

- 1633년 70세의 노인 갈릴레오는 종교 재판을 받았다.

 

 이 기간에 수학자들의 연구에 진전이 없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도 아니다. 르네상스까지의 유럽 수학은 대체로 약 2천 년 전에 바빌로니아 인이 도달하였던 수준에 머물렀고, 이러한 발전도 대부분 힌두인들이나 극동인과 접촉하였던 아랍인들과 무어인들로부터 선택적으로 받아들인 지식에 기인한 것이다.

<π의 역사, 페트르 베크만 지음, 박영훈 옮김, 실천문학사, 1994>

   

   

    

     

4월 12일 화요일

Kindness, nobler ever than revenge. <As You Like It, IV iii, 129>

친절은 복수보다 훨씬 고결한 것이다.

 


 남으로 창을 내겠소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오늘의 맹자(孟子)

今天下地醜德齊, 莫能相尙. 無他,

好臣其所敎, 而不好臣其所受敎. 

지금 천하의 제후들이 영토에 있어서나, 덕에 있어서나, 서로 비슷하여 서로가 뛰어나게 낫지 못한 이유가 다른 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임금이 자기만 못한 사람을 신하로 두고, 가르침을 받을 만한 사람을 신하로 두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湯之於伊尹, 桓公之於管仲, 則不敢召.

管仲且猶不可召, 而況不爲管仲者乎? 」 

탕왕은 이윤에 대해서, 환공은 관중에 대해서 감히 불러온 일이 없습니다.

관중 같은 사람도 마음대로 부를 수 없었는데 더구나 관중의 흉내 같은 건 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에게 어찌 그러시는 것입니까?”


 * 중국에서의 원주율

- 130년 후한서에는 파이를 101/2에 근접한 3.1622를 사용하였다.

- 중국인들은 고대인들 가운데 유일하게 처음부터 10진법을 사용하였다.

- 718년의 문헌은 파이를 92/26 = 3.1724로 표현하였다.

- 264년 유휘는 아르키메데스의 내접다각형의 변형을 사용하였다. 그는 3072각형을 사용하여 파이는 3.14159를 얻었다.

- 5세기경에 조충지와 그의 아들 조항지는

                              3.1415926< pi < 3.1415927

을 얻었다. 이는 유럽에서 16세기까지도 구할 수 없었던 정확한 값이다.

 그러나 이를 너무 과장해서 확대할 필요는 없다. 파이가 계산되는 소수점의 자릿수는 아르키메데스 시대 이래로 단순히 계산 능력과 끈기의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임성삼; 백인종이 동양의 뛰어난 점을 보았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폄하(貶下)의 좋은 예입니다. 백인이 동일한 계산을 하면 정확하다고 칭찬을 하면서, 동양인이 한 경우에는 단순한 끈기로 가치를 절하하고 있습니다. 고약한 일입니다.]

중요한 점은 아르키메데스와 같이 중국인들도 파이를 그 정확도에 있어 원하는 데까지 계산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 그러나 중국인이 가졌던 고도의 정확성은 같은 시대의 서구인보다 뛰어난 계산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제기하므로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인은 자리를 나타내는 숫자로 0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후에 힌두인들은 영에 해당하는 자리숫자로 원을 사용하였는데, 이것이 아랍과 무어인을 거쳐 중세 말기(이탈리아)와 르네상스 시대(영국)에 이르러서야 유럽에 전해졌다.

<π의 역사, 페트르 베크만 지음, 박영훈 옮김, 실천문학사, 1994>

 

- [5세기 조충지(429~500)가 3.1415926< pi < 3.1415927 을 계산했다는 것을 말한 후]

흔히 서양의 과학이 항상 앞서 왔고, 동양은 뒤진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서양의 과학이 앞선 것은 16~17세기 과학 혁명 이후로, 불과 300~400년밖에 안 된다. 중세까지의 세계 3대 발명품 죽 나침반, 화약, 종이가 모두 중국에서 발명되었고, 중국은 15세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값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는 적어도 192각형 이상을 계산해서 무려 소수점 아래 384자리 이상의 수치들을 반복해서 계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전자 계산기도, 컴퓨터도 없던 시대의 그의 업적은 중국인, 나아가서 동양인의 끈기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과학사 X파일, 최성우, 사이언스북스, 1999>

 

* 파이의 처음 몇 자리 수만 제외한 그 이상의 자리수는 실제 문제에 이용할 가치도 없고 과학적인 면으로도 가치가 없다.

정교한 엔진을 제작하여도 소수점 이하 네 자리만으로 충분하고,

지구가 매끄러운 공이라는 가정하에(비례로 따진다면 사실상 지구가 당구공보다도 더 매끄럽다) 1인치 내의 오차로 지구 둘레를 측정할 수 있다.

 

* 파이의 소수점 이하 자릿수들을 기억하는 방법;

 How I want a drink, alcoholic of course, after the heavy lectures involving quantum mechanics! (3.14159265358979)

<π의 역사, 페트르 베크만 지음, 박영훈 옮김, 실천문학사, 1994>

 

   

   

4월 13일 수요일

 

And I feel within me

A peace above all earthly dignities,

A still and quiet conscience. <Henry VIII, III ii, 379>

나는 이 세상 모든 권세로도 바꿀 수 없는

마음의 평화와, 고요하고 안정된 양심을 느끼고 있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봄 C

                                                                  김춘수


어디서 목련(木蓮) 봉오리 터지는 소리
왼종일 그 소리
뜰에 그득하다
아무 것도 없어도 뜰은
소리 하나로
고운 봄을 맞이한다
                 


 오늘의 맹자(孟子)

 

3. 노자(路資)와 뇌물

  陳臻問曰:  「前日於齊, 王餽兼金一百而不受; 於宋, 餽七十吳而受; 於薛, 餽五十鎰而受.

前日之不受是, 則今日之受非也; 今日之受是, 則前日之不受非也.

夫子必居一於此矣. 」 

진진이 맹자에게 물었다.

 “앞서 제나라에서 왕이 순금 백 일(鎰)을 주었을 때, 이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송나라에서 70일을 주었을 때 이를 받으시고, 설(薛, 맑은 대쑥 설) 나라에서도 50일을 받으셨습니다.

 앞서 받지 않으신 것이 정당한 것이었다면, 이번에 받으신 것이 잘못일 것입니다. 이번에 받으신 것이 옳은 것이면, 앞서 받지 않으신 것이 잘못일 것입니다.

 선생님께서는 반드시 이 중 어느 한쪽을 택하셨어야 했습니다.”

 


 * 5 세기?; 숫자 0(영(零)과 자릿수의 발견

- 0의 뜻 세 가지

305; 여기의 0은 10의 자리의 수가 없다는 뜻 - 빈자리 0, 1000

수가 전혀 없을 때 0 - 無의 0

온도계에서의 0도 - 기준의 0

 

- 0과 수의 자리 발견;

기원전 2 세기의 바빌로니아, 기원후 1 세기의 중국, 기원후 3-6 세기의 마야인

그러나 0을 단지 공백을 채우는 기능만

 

- 0을 무의 개념; 기원후 5 세기 인도

(유럽인은 그리스의 학문을 보존하지 못했다. - 아랍인이 보존(8-12 세기) - 다시 유럽)

아랍인의 숫자 체계를 십자군이 받아 왔으나 15 세기까지 계속 반발 - 로마식 계산법 사용

1789년 프랑스 혁명 이후 학교, 관공서의 로마식 셈틀 사용을 법으로 금지 - 아랍 수학이 대

 

* 영은 기원전 2세기 중국의 산술이나(점으로 표기) 그보다 훨씬 앞서 마야 인들의 문명에서(나선으로 표시)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영은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다.

- 7세기에 페르시아 인들은 인도의 영을 모방했다. 몇 세기 후에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 인들로부터 그 수를 빌려 왔고, 그것에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을 붙였다(아라비아 말로 시파는 <비어 있음>을 뜻한다).

- 유럽에는 13세기가 되어서야 이탈리아의 수학자 레오나르도 피보나치(필리오 디 보나치를 줄여 부르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는 피사의 레오나르도라고도 불렸는데, 그 별명과는 달리 베네치아의 상인이었다.

- 그는 동시대 사람들에게 영의 개념이 얼마나 유익한지를 설명하려고 애썼다.

- 영은 당시로서는 완전히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다른 수에 붙이면 그 수를 열 배로 만들 수 있었다. 영을 덧붙임으로써 계량 단위의 변화를 장황하게 표시하지 않고도, 십 백 천 만의 계수를 얻게 되었다.

 영은 아무 값이 없는 수로, 다른 수의 오른쪽으로 가져가면 어마어마한 힘을 주고, 왼쪽으로 가져가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1996>

     

    

   

4월 14일 목요일

Every man's conscience is a thousand men,

To fight against this guilty homicide. <Richard III, V ii, 17>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은 잔인한 살인자와 싸우는 천명의 군대입니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불이 켜진 창마다

 박 목 월

 

 

밤늦도록

불이 켜져있는

창을 생각한다.

불빛 앞에서

수학을 풀고 외국어를 익히고

위대한 인류의 흥망과 업적을 공부하는

젊은 날의

흰 이마와

검은 눈동자를 생각한다.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일에의 확신과 신뢰로

오늘을 가꾸는

진리의 꽃나무.

비약에의 푸른 날개.

밤 깊도록 짜고 있는

꿈의 자리.

참으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내일을 위하여

오늘의 성의를 다하는

심야의 집중

씨앗의 의지.

물론 내일은 오게 된다.

신뢰와 확신과 인내의

가지마다

만발하게 꽃피는

꽃나무의 축복.

더욱 참되게 아름답게 살려는

의욕의 지평선 위로

찬란하게 동트는

장미와 순금의 새벽.

미래의

신비스러운 베일을 벗고

면사포로 앞을 가린

소망의 신부.

정오의 하늘을 나는

희고 든든한 이상의 나래.

진실로

인생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밤 깊도록

불을 켜놓고

수학을 풀고 외국어를 익히고 역사를 공부한

넉넉한 문맥 속에서

우리의 인생은

눈물어린 눈동자에

미소를 머금고 다가온다.

그날을 위한

오늘의 발돋움

오늘의 열중.

밤늦도록 불이 켜져 있는 창마다

신의 축복이

서려 있다.

 


 오늘의 맹자(孟子)

孟子曰:  「皆是也.

맹자가 대답했다.

“어느 것이나 다 정당한 것이다.

 

當在宋也, 予將有遠行. 行者必以贐, 辭曰:  餽贐. 予何爲不受? 

송 나라에 있을 때에, 나는 장차 멀리 여행을 떠나려 하였다. 여행을 떠나는 사람에게는 노자를 주기 마련이다. 임금이 전해온 말에, ‘노자로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왜 받지 않겠는가?

 

當在薛也, 予有戒心. 辭曰:  聞戒. 故爲兵餽之, 予何爲不受? 

 설 나라에 있을 때에는 내 신변이 위험할 때였다. 임금이 전해온 말에, ‘신변이 위험하다고 하니 경호원의 비용으로 쓰십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왜 받지 않겠는가?

若於齊, 則未有處也. 無處而餽之, 是貨之也. 焉有君子而可以貨取乎? 」 

 그러나 제나라에서는, 받아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정당한 이유 없이 많은 돈을 주는 것은 돈으로 환심을 사려는 것이다. 군자로서 어떻게 그런 뇌물을 받을 수 있겠는가?”


 

* 서기 375년, 유럽인들은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몸이 부르르 떨리는 일을 경험했다. 광활한 아시아로부터 온 야만적인 기마 집단이 동쪽 국경을 유린하자, 살인과 고문 그리고 불탄 마을에 관한 충격적인 소식이 그들보다 먼저 도착했다. 로마 세계권은 공포의 도가니에 빠졌다. 훈족이 온다! 세상의 종말인가? 성서에 예언된 지구의 종말이 온 것인가?

- 로마인들은 훈족의 특별한 안장에 경탄했다. 훈족의 안장은 로마인의 안장처럼 말의 몸통에 가죽끈으로 잡아매는 평범한 것이 아니다. 훈족의 안장은 특별한 나무 버팀목이 있다. 앞뒤로 높이 올려진 우뚝한 기둥과 안장머리는 말이 움직일 때 기수에게 안정감을 준다. 지금도 아시아 초원지대의 안장은 이렇게 만든다.

- 유럽인은 훈족의 말이 작고, 추하고, 북슬북슬하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훈족의 말은 강인하고, 많은 짐을 운반할 수 있으며, 다루기가 까다롭지 않다. 말은 겨울에 눈 속에서 먹이를 직접 찾는다. 훈족 전사 한 명이 말 일곱 마리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헝가리에서 한 기수에게 말 여섯 마리를 빠른 속도로 끌어볼 것을 부탁했다. 승마에 대해 약간이라도 아는 사람은 말 여러 필을 동시에 부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훈련의 결과인지 안다.

 

- 안장 외에 훈족은 전쟁기술 면에서 혁명적인 발명품을 아시아에서 들여왔다. 그것은 유럽에서는 알지 못하던 등자였다. 훈족은 장시간 말을 탔을 때 다리의 피곤을 예방하는 차원에서 발을 받쳐주는 가죽 밴드나 아마로 된 일종의 발주머니를 안장에 부착했다. 그 당시의 기록자는 ‘털이 난 다리 주변을 묶는, 돌돌 감은 염소가죽’이라고 표현했다. 나무나 쇠로 된 등자는 훈족시대가 끝날 무렵인 5세기 중엽에야 등장했다. 그러나 초기 형태의 등자도 몸을 똑바로 세우고 사방으로 몸을 돌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기수는 나무 안장에 단단하게 앉아 다리를 고정하는 발판을 사용하여 말을 달리면서 사방으로 화살을 발사할 수 있었다.

[임성삼; 700년 아랍인이 아프리카 북부를 지나 스페인으로 진격할 때 등자를 처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 훈족의 기적의 무기는 특이하게 제작된 활과 새로운 형태의 화살이었다. 활은 잡는 중간과 끝 사이가 구부러져 있고, 끝과 중간 부분을 평평하게 만든 뼈로 강화했다. 이 활은 당길 수 있는 중간 부분과 활의 현에 놓인 화살의 끝 사이 폭이 매우 짧다.

 그리고 이런 활은 아래쪽보다 위쪽이 더 많이 구부러져 있다. 이는 기병이 손을 더 자유롭게 놀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이 때문에 ‘불균형의 반사궁’이라고 불린다.

 화살촉은 삼각형 모양의 뾰족한 철이었고 화살의 길이는 대략 60~80센티미터였다. 유럽인이 전혀 접해보지 못했던 화살의 파괴력은 치명적이었다. 가죽으로 만든 로마의 갑옷을 종이조각처럼 뚫고 큰 상처를 입혔다. 훈족의 활은 60미터 떨어진 거리의 목표물도 명중시킬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훌륭하였다. 그러므로 훈족의 병사들은 칼, 창으로 싸우는 전통적인 병사의 사정거리를 벗어나 공격할 수 있었다. 훈족은 적과 직접적인 접촉 없이 공격할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군사적으로 우월했다.

[임성삼;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로마인의 무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가벼운 창 외에 군단보병은 필룸(pilum)이라고 부르는 매우 크고 긴 투창을 오른손에 가지고 있었다. 필룸의 길이는 긴 것이 약 6 피트이고, 창날은 18 인치(46 cm) 정도의 커다란 삼각형 뾰족끝으로 되어 있었다(이 무기도 시대의 흐름과 더불어 변화가 있었던 것 같지만 상세한 내용은 생략한다). 이 긴 창의 비행거리는 불과 10 피트(3.05 m)나 12 피트(3.66 m) 밖에 안되며 더욱이 한 번 던지는 것으로 끝났으므로 근대화기와 비교하면 매우 빈약한 무기였다. 그러나 숙련된 명인이 이것을 던지면 도저히 그것을 사정거리 안으로 접근할 수 있는 기병(騎兵)이 없었으며, 또 어떠한 방패나 몸통갑옷도 육중한 이것의 중량에 견뎌내는 것이 없었다.’

 좋은 활을 가지고 있는 훈족이 이런 창의 사정거리까지 다가갈 이유가 없었다. 훗날 징기스칸의 군대도 좋은 활과 여러 필의 좋은 말로 적을 둘러싸고 돌며 적의 수가 반으로 줄 때까지 활을 쏘아대었다. 그 후에야 근접전을 벌였다.]

 

- 훈족의 전술은 결정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500명에서 1000명으로 이루어진 강한 소부대를 만들어 화살을 비오듯 쏟으며 여러 쪽에서 동시에 적을 공격했다. 적이 달려오면 훈족은 도망치는 척하면서 적을 유인했다. 그러면 그때까지 숨어 있던 화살 부대가 공격을 시작했다. 이런 매복장소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적병은 대부분 불과 몇 명인 경우가 많았다.

 

[임성삼; 이상의 세 가지 무기로 훈족은 유럽 최강의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무기와 전술로 적을 떼어놓고 공격하는 훈족이 야만족인지, 아니면 함성을 지르며 가까이 가서 창과 칼로 전투를 하는 것이 야만족인지 판단하기 바랍니다.]

 

- 훈족의 이런 군사적 우월성으로 인해 서양 사람들은 마치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충격에 빠져들었다. 서양은 자신들과 다른 전투방식을 사용하는 훈족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길 때까지 적과 눈을 맞대고 싸우는 고대의 전술은 이제 소용없어졌다.

 

- 인명 피해가 갈수록 늘자 로마는 방어수단을 강구했다. 군사들에게 쇠사슬로 만든 갑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장비는 행진을 할 때나 전장에서 매우 거추장스러웠다. 군인들은 예전보다 자신의 몸을 잘 보호할 수는 있었으나, 더 이상 자유롭게 움직일 수도, 자유자재로 싸울 수도 없었다.

 

* 451년 2월에 거대한 다민족부대가 아틸라(Attila 406?∼453)의 지휘하에 로마에 도착했다. [로마는 점령하지 않고 프랑스의 서북부로 진출한다.]

 아틸라는 메스를 약탈했다. 그가 이 도시를 황폐화시킨 날은 피의 부활절 일요일로 역사에 남아 있다. 이제 랭스와 루앙과 캉 차례이다. 훈족과 동맹국들은 무방비 상태의 도시를 요한계시록의 기병들처럼 습격했다.

 랭스의 주교는 예복을 완전히 갖추고 시편을 노래하면서 성스런 그릇을 손에 들고 자비를 청하기 위해 훈족을 마중나갔다. 그는 노래 부르면서 참수당했다.

 후에 파리 시의 수호성인이 된 주느비에브는 센 강변의 도시 거주민들에게 그대로 머무르라고 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흰 옷을 입은 주느비에브는 아틸라를 마중했고 그에게 몰락을 예언했다고 한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아틸라는 파리를 점령하는 데 불필요한 힘을 쓰지 않고 계속 오를레앙으로 행군했다.

 오를레앙은 5월에 포위되어 격전이 벌어졌고, 마침내 6월 말 함락되었다. 훈족이 승리를 축하하고 있을 때, 갑자기 정복된 것처럼 보였던 상대측에서 함성이 일어났다. 아이티우스가 성문 앞에 서 있었다. 도시 앞은 전쟁터가 되었다. 그러나 임시 협상이 이루어졌다.

 마지막 전투는 트로아 읍 근처의 마우리아쿰에서 일어났다. 전사자는 1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50만이 전사했다는 평가도 많다.

 “여기 샹파뉴는 훈족을 집어삼켰다”고 프랑스이 작가 빅토르 위고는 썼다. 매년 그 날 이곳에서 전투의 함성과 부상당한 병사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민간에 전해진다.

 이제까지의 가장 큰 전투는 승자 없이 끝났다.

 로마와 연맹한 서고트의 왕 테오데리크는 전장에서 전사했다. 왕의 시신을 가지고 서고트는 전장에서 퇴각했다.

   

    

 

4월 15일 금요일

Be just, and fear not. <Henry VIII, III ii, 446>

올바르라, 그리고 두려워하지 말라.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박두진

 

이는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

 

한 번만의 어느날의

아픈 피흘림

 

먼 별에서 별에로의

길섶 위에 떨궈진

 

다시는 못 돌이킬

엇갈림의 핏방울

 

꺼질 듯

보드라운

 

황홀한 한 떨기의

아름다운 靜寂

 

펼치면 일렁이는

사랑의

湖心아.

 


 오늘의 맹자(孟子)

 

4. 정치가의 책임의식

  孟子之平陸. 謂其大夫曰: 

「子之持戟之士, 一日而三失伍, 則去之否乎? 」

:  「不待三. 」

 맹자가 제나라의 평륙 지방에 가서 그곳 대부에게 말했다.

 “선생의 부하 가운데 창을 든 병사가 하루 세 번 자기의 대오를 잃었다면, 그를 징계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않으시겠습니까?”

 “세 번까지 기다리지 않습니다.”

 

「然則子之失伍也亦多矣. 

凶年饑歲, 子之民, 老羸轉於溝壑, 壯者散而之四方者, 幾千人矣. 」

:  「此非距心之所得爲也. 」 

 “그렇다면 선생도 대오를 떠난 것이 여러 번이 됩니다.

흉년이나 기근이 든 해에는, 선생의 백성 중에 노인과 어린아이들은 진구렁창에 빠져 죽고, 장정이 사방으로 흩어진 자들이 수 천 명이나 됩니다.”

 “그것은 저 구의 마음으로는 어째 볼 수 없는 일입니다.”


* 587년 중국에서 과거(科擧)가 시작되다

 

중국과 한국사회에서 관리를 뽑던 관리등용제도.

 

중국

587년 수(隋) 문제(文帝)가 처음 실시했고, 그뒤 수 양제(煬帝)가 진사과(進士科)를 처음 설치하면서 제도화되었다. 당대(唐代)에는 수재과(秀才科)·명법과(明法科)·명서과(明書科)·명산과(明算科)를 증설했고, 측천무후(則天武后) 때 전시(殿試)를 처음 실시하고 무과(武科)도 함께 실시했다. 과거제도는 명대(明代)에 와서 더욱 정비되었다. 3년마다 각 성(省)에서 1번씩 치르는 향시(鄕試)에 합격한 사람을 거인(擧人)이라 했는데, 이들은 3년마다 수도에서 열리는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이 시험에 합격한 자를 공사(貢士)라고 불렀다. 이들은 황궁에서 황제가 친히 주관하는 최종시험인 전시에 참가했고, 여기서 3급(갑과·을과·병과) 이상으로 합격한 사람들만 관원으로 채용하였다. 장과합격자는 '진사급제'(進士及第)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1등은 장원(狀元), 2등은 방안(榜眼), 3등은 탐화(探花)라고 불렀다. 을과 합격자에게는 '진사출신'(進士出身), 병과 합격자에게는 '동진사출신'(同進士出身)이라는 칭호가 주어졌다. 이들은 한림원(翰林院)의 수찬(修撰)·편수(編修)·서길사(庶吉士) 등의 관직에 임명되었다. 명대의 과거제도는 청대(淸代)까지 이어졌으나 1905년 학교교육을 실시하면서 폐지되었다.

 

한국

국가가 관리임용을 위하여 실시하던 시험. <과거>란 과목(科目)에 따라 선비를 등용한다는 뜻인데 여기서 과목이라 함은 시험과목이 아니라 시험의 종류를 의미한다. 이 제도는 원래 중국의 관리 등용을 위한 시험제도로서 한(漢)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한국에서 과거제도가 시작된 것은 788년(신라 원성왕 4)으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독서3품과라고도 함)가 있는데 한국 과거제도(科擧制度)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관리임명을 골품제도에 의하지 않고 한문(漢文) 성적으로 인재등용의 원칙을 세웠지만,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쳐 제대로 실시되지 못하였다. 엄격한 의미의 과거제도는 고려 광종 때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뒤 1895년 갑오경장 때까지 지속되어 과거제도가 이 나라의 정치·문화에 끼친 영향이 자못 컸다.

[임성삼: 서양과 일본에서는 1900년에 이르도록 족벌에 의한 임용제도가 일반적이었습니다.]

   

 

  

   

4월 18일 월요일

Assume a virtue, if you have it not. <Hamlet, III iv, 161>

덕을 갖추지 못했으면, 있는 척이라도 하라.   

[임성삼; 위선자가 막가는 사람보다는 낫다고 생각될 때도 있습니다.]


 

산방(山房)

                                      조지훈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단비 맞고 난초잎은

새삼 치운데

 

별바른 미닫이를

꿀벌이 스쳐간다.

 

바위는 제자리에

옴찍 않노니

 

푸른 이끼 입음이

자랑스러라.

 

아스럼 흔들리는

소소리 바람

 

고사리 새순이

도르르 말린다.

 


 오늘의 맹자(孟子)

 

: 「今有受人之牛羊而爲之牧之者, 則必爲之求牧與芻矣. 求牧與芻而不得, 則反諸其人乎? 抑亦立而視其死與? 」

:  「此則距心之罪也. 」 

 “그렇다면 지금 소와 양을 먹여 달라고 부탁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방목지와 목초를 구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만일 방목지와 목초를 구하지 못했다면 맡은 소와 양을 주인에게 돌려 주어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우두커니 선 채 굶어 죽어가는 모양을 보기만 해야 합니까?”

 “그것은 저의 죄입니다.”

 

他日, 見於王曰:  「王之爲都者, 臣知五人焉. 知其罪者, 惟孔距心.」 爲王誦之. 

王曰:  「此則寡人之罪也. 」 

후 일, 맹자는 왕을 만나자 말했다.

 “왕이 다스리는 도시에 제가 아는 사람이 다섯 있습니다. 그 중에서 자기 죄를 아는 사람은 공거심 한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왕을 위해 공거심과 주고 받은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왕이 말했다.

 “그것은 과인의 죄입니다.”

 


 * 마호메트(Muhammad, 570경 아라비아 반도 메카~632 메디나)

- 두 조각의 빵을 가진 사람은 그 하나를 수선화와 바꾸라. 빵은 육체의 양식이나 수선화는 마음의 양식이다.

- 마호메트가 사망할 때인 632년 경에는 회교의 범위가 남부 아라비아 뿐이었다.

- 711년 스페인 침입, 1492년 물러감(781년) [임; 그 동안 유럽에 예절을 가르치고, 음식 먹는 순서(현재의 양식의 음식이 나오는 순서)도 가르쳤다.]

- 732년 프랑스 중부의 투르 전투에서 이슬람의 유럽 정복이 저지당하다.

 

  

   

4월 19일 화요일

Men's evil manners live in brass; their virtues

We write in water. <Henry VIII, IV ii, 45>

인간의 악행은 놋쇠로 된 기념패에 남기지만,

그의 미덕은 물 위에 적어둔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혁명

                                조지훈

 

아 그것은 홍수(洪水)였다.

골목마다 거리마다 터져나오는 함성(喊聲)

 

백성을 암묵(暗默) 속으로 몰아넣는

<불의(不義)한 권력(權力)을 타도(打倒)하라>

양심과 순정(純情)의 밑바닥에서 솟아오른

푸른 샘물이 넘쳐 흐르는

쓰레기를 걸레 쪽을 구더기를 그

죄악(罪惡)의 구덩이를 씻어내리는

아 그것은 파도(波濤)였다.

東大門에서 鐘路로 世宗路로 西大門으로

逆流하는 激情은 바른 民心의 새로운 물길,

피와 눈물의 꽃波濤

東大門에서 大韓門으로 世宗路로 景武臺로

넘쳐흐르는

이것은 義擧 이것은 革命 이것은

안으로 안으로만 닫혔던 憤怒

 

온 長安이 출렁이는 이 激流 앞에

웃다가 외치다가 울다가 쓰러지다가

끝내 흩어지지 않는 피로 물들인

온 民族의 이름이여

일어선 자여

 

그것은 海溢이었다.

바위를 물어뜯고 왈칼 넘치는

不退轉의 意志였다. 고귀한 피값이었다.

 

正義가 이기는 것을 눈 앞에 본 것은

우리 평생 처음이 아니냐

아 눈물겨운 것

그것은 天理였다.

그저 터졌을 뿐 터지지 않을수

없었을 뿐

愛國이란 이름조차 차라리

붙이기 송구스러운

이 빛나는 波濤여

해일(海溢)이여!

 


 오늘의 맹자(孟子)

 5. 직무와 직책

  孟子謂蚔叶曰:  「子之辭靈丘而請士師, 似也, 爲其可以言也. 今旣數月矣, 未可以言與? 」 

 맹자가 지와에게 말했다.

 “그대가 영구에서의 벼슬을 그만두고 사사(師事, 옥관)를 바란 것은 그럴듯합니다. 조언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미 몇 달이 지났는데,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까?”

 

蚔叶諫於王而不用, 致爲臣而去. 

지와가 왕에게 간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벼슬을 내어 놓고 떠났다.

 

齊人曰:  「所以爲蚔叶, 則善矣; 所以自爲, 則吾不知也. 」 

 제나라 사람들이 말했다.

 “지와를 위해 한 일은 좋다. 그러나 (맹자) 스스로를 위해 하는 일은 알 수 없다.”

 

公都子以告. 

 (맹자의 제자) 공도자가 이 말을 전했다.

 

:  「吾聞之也: 有官守者, 不得其職則去; 有言責者, 不得其言則去. 我無官守, 我無言責也, 則吾進退, 豈不綽綽然有餘裕哉? 」 

 맹자가 말했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벼슬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직무를 다 할 수 없으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

간언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은 그가 말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직책에서 물러나야 한다.

지금 내게는 맡은 바 벼슬도 없고, 또 내게는 간언의 책임도 없다. 그러므로 나의 진퇴(進退)에 있어 어찌 넉넉하며 여유가 없겠는가?

 


 * 오마르(Umar, 586(?)~644년 암살당함) 이슬람 2대 칼리프로 634년~644년

636년 비잔틴군을 무찌르고 압도적인 승리

같은 해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시를 함락.

638년 예루살렘 함락. 오마르는 하인 한 사람과 한 마리의 낙타를 번갈아 타며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호화로운 옷을 입은 장군들에게 흙을 던지며 질타. 이후로 아랍군은 간단한 옷과 음식으로(흙 위에 앉아, 음식 그릇은 무릎에) 정복을 계속함.

639년 이집트 침략하여 641년 정복 완료.

641년 이라크 전역 정복, 현재의 터키지역으로 진격.

644년 서부 이란의 전 지역을 지배. 북아프리카에 대한 원정 계속.

이 정복된 지역은 완전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오늘날까지 회교국으로 남아 있다.

 

* 연개소문   淵蓋蘇文 ?~665 (?~보장왕 24) 천개소문(泉蓋蘇文; 위의 당고조 이연의 이름과 동일한 글자이므로)

김유신      金庾信   595~673 (진평왕 17~문무왕 13)

을지문덕(乙支文德 ?~?, 612년 살수대첩)

이세민     李世民  600~649    당태종,  수양제와 이세민 모두 49 년을 살았음

 

이백(李白, 701~762)   字는 太白, 號는 靑蓮 또 스스로 酒仙翁

두보(杜甫, 712~770)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長安) 남쪽 근교의 소릉(小陵)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두보 자신의 말에 따르면, 이미 소년시절에 1000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전해져 오는 것은 30세 이후에 쓴 1400여 편의 시와 몇몇 산문뿐이다. 

    

  

   

4월 20일 수요일

I never did repent for doing good. <베니스의 상인, III iv, 10>

선을 행하고 후회한 적이 없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기 도

박두진

 

 

정직한 미움을 말하되

거짓된 사랑을 말하지 않게 하소서

정직한 분노를 말하되

거짓된 인내를 말하지 않게 하소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이기보다는

만년을 그냥 있는 의연한 바위로,

고여서 오래 썩는 못물보다는

광란의 밀어치는 노도가 되게 하소서.

 

당신의 눈물이 우리의 눈물되게

당신의 피흘림이 우리의 피흘림되게

당신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

당신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되게 하소서.

 

일체 잠든 우리의 양심에

활 활 불을 당기소서.

일체 죽은 우리의 영에

사랑을 뜨거이 불지르소서.

     


 오늘의 맹자(孟子)

 6. 사람을 대하는 법

  孟子爲卿於齊, 出弔於滕, 王使蓋大夫王驩爲輔行. 王驩朝暮見, 反齊滕之路, 未嘗與之言行事也. 

 맹자가 제나라의 경이 되어 등나라로 조문을 갔다. 왕이 합읍의 대부인 왕환을 부사(副使)로 따라가게 하였다. 왕환이 조석으로 맹자를 만났는데, 제나라로부터 등나라에 갔다오기까지 한 번도 행사에 관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公孫丑曰:  「齊卿之位, 不爲小矣; 齊滕之路, 不爲近矣. 反之而未嘗與言行事, 何也? 」

:  「夫旣或治之, 予何言哉? 」 

 공손추가 말했다.

 “제나라 경(卿)의 지위가 작다고 볼 수 없고, 제나라에서 등나라까지의 길이 가깝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가고 오는 동안 왕환과는 행사에 대해 한 번도 이야기한 일이 없으시니 어찌된 일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왕환이 모두 알아서 하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겠는가?”

[임성삼; 결국 학자가 정부의 일을 담당하게 되면, 이렇게 전문관료에게 맡기고 그것을 감독하는 수 밖에 없는 것일까요?]

 


 * 610년

 수 왕조가 창립된 후 수 문제는 개황 4년에서 수 양제 대업 6년에 이르는 27년의 기간 동안 광통거, 산양독, 통제거, 영제거, 강남 운하 등을 굴착, 준설하여 황하와 회하 지역, 중원 지역과 허베이 평원을 긴밀하게 연결하었다.

 해하, 황하, 회하, 장강과 첸탄강의 5대 강을 서로 소통시켰으며, 지금의 베이징, 톈진, 허난, 허베이, 산시, 산둥, 안후이, 장쑤, 저장 등의 9개 성과 시를 거쳐 2,700킬로미터 길이의 세계 수리 공사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방대한 운하 체계를 형성하였다.

<손에잡하는 중국역사의 수수께끼, 왕웨이 외, 박점옥 옮김, 대산인문과학총서 4, 2001>

    

    

  

4월 21일 목요일

How far that little candle throws his beams!

So shines a good deed in a naughty word. <베니스의 상인, V i, 90>

그 작은 촛불이 어디까지 빛을 비추는가!

이 추악한 세상에서 선행(善行)이여 빛을 발산하라.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이런 시(詩)

 

                               박목월

 

 

슬며시 다가와서

나의 어깨를 툭치며

아는 체 하는

그런 詩,

대수롭지 않게

스쳐가는 듯한 말씨로써

가슴을 쩡 울리게 하는

그런 詩,

읽고 나면

, 그런가부다 하고

지내쳤다가

어느 순간에

번개처럼

번쩍 떠오르는

그런 詩,

투박하고

어수룩하고

은근하면서

슬기로운

그런 詩

슬며시

하늘 한자락이

바다에 적셔지는 듯한,

푸나무와

푸나무 사이의

싱그러운

그것 같은

그런 詩,

밤 늦게 돌아오는 길에

문득 쳐다보는,

갈라진 구름 틈서리로

밤하늘의

눈동자 같은

그런 詩.

 

 


 오늘의 맹자(孟子)

 7. 친상에 대하여

  孟子自齊葬於魯, 反於齊, 止於嬴. 充虞請曰:  「前日不知虞之不肖, 使虞敦匠事. 嚴, 虞不敢請. 今願竊有請也, 木若以美然. 」 

 맹자가 제나라에서 노나라로 가서 장사를 치르고 다시 제나라로 돌아올 때 영읍에 머물렀다.

 충우가 청하여 말하였다.

 “일전에 충우의 불초함을 모르시고 관 만드는 일을 돌보게 하셨는데 급하여 제가 말씀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조용히 말씀올리겠습니다. 관이 너무 아름답더군요.”

 

:  「古者棺槨無度, 中古棺七寸, 槨稱之. 自天子達於庶人. 非直爲觀美也, 然後盡於人心. 

 맹자가 말했다.

 “옛날에는 관곽에 법도가 없었다. 중고(中古)에는 관의 두께가 7촌이었고 곽도 이에 맞도록 하였다. 천자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단지 아름답고 보기 좋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런 후에야 마음에 흡족하였기 때문이다.

 

不得, 不可以爲悅; 無財, 不可以爲悅. 得之爲有財, 古之人皆用之, 吾何爲獨不然? 

이렇게 하지 못하면 마음이 기쁘지 않았다. 재산이 없어 이렇게 하지 못하면 기쁘지 않았다. 재물이 있어 이렇게 할 수 있으면, 옛날 사람들은 그것을 모두 사용하였다. 내 어찌 혼자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且比化者, 無使土親膚, 於人心獨無恔乎? 

또 죽은 자를 위해 흙이 살에 닿지 않게 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도 즐겁지 않겠는가?

 

吾聞之君子: 不以天下儉其親. 」 

내가 듣기에는 군자는 천하 때문이라 하여 그 부친상을 검소하게 하지 않는다.

[임성삼; 이 개념으로 인해 여러가지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 세계최초의 목판인쇄; 우리나라

- 목판인쇄;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 <무구정광 다라니경>이 706~751년 사이에 인쇄된 것으로 세계 최초이다. 그 전에는 중국 당나라에서 712~756년에 최초의 목판인쇄가 시작되었다고 알려졌었다.

 

- 현재까지 시대가 알려진 가장 오래 된 목판본은 1966년 한국 불국사의 사리탑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주>이며 약 8세기 초에 인쇄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여기에는 약 8세기 초 측천무후가 널리 시행했던 특수한 모양의 한자가 몇 개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을 자주 오갔던 한반도의 승려와 유학생들이 불국사를 건축할 때 새로 나온 목판 인쇄 <다라니경주>를 축하하는 뜻으로 불국사에 가져다 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임성삼; 남의 나라에서 발견된 것도 자기 나라에서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중국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 된 판목 인쇄본은 당 함통 9년(868)의 금강경이다. 이 경문의 각인은 아주 정교하고 아름다우며 글자체는 투박하면서도 단정한 기풍이 들어 있다. 그 기교와 수준으로 판단해 볼 때 이 금강경은 절대 조판 인쇄의 최초 작품이 아니며, 이것이 있기 전에 이미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조판 인쇄 방면의 발전 기간이 있었다고 본다.

<손에잡하는 중국역사의 수수께끼, 왕웨이 외, 박점옥 옮김, 대산인문과학총서 4, 2001>

    

    

   

4월 22일 금요일

Past and to come seem best, things present worst. <헨리 4세, 2부, I iii, 108>

과거와 미래는 좋아 보인다. 현재는 최악이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사월의 노래

 

                                                              노천명

 

 

사월이 오면 사월이 오면은......

향기로운 라일락이 우거지리

회색빛 우울을 걷어버리고

가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저 라일락 아래로- 라일락 아래로

 

푸른 물 다담뿍 안고 사월이 오면

가냘픈 맥박에도 피가 더하리니

나의 사랑아 눈물을 걷자

청춘의 노래를, 사월의 정열을

드높이 기운차게 불러보지 않으려나

 

앙상한 얼굴의 구름을 벗기고

사월의 태양을 맞기 위해

다시 거문고의 줄을 골라

내 노래에 맞추지 않으려나 나의 사람아!

 


 오늘의 맹자(孟子)

 8. 불의를 칠 수 있는 자격

  沈同以其私問曰:  「燕可伐與? 」

孟子曰:  「可. 子噲不得與人燕, 子之不得受燕於子噲. 有仕於此, 而子悅之, 不告於王而私與之吾子之祿爵; 夫士也, 亦無王命而私受之於子, 則可乎? 何以異於是? 」 

 심동이 사사로이 찾아와서 물었다.

 “연나라를 정벌해도 좋겠습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좋습니다. 자쾌도 연나라를 왕에게 줄 수 없으며, 자지(子之)도 연나라를 자쾌에게서 받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벼슬살이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이 좋아한다고 해서 왕에게 알리지도 않고 사사로이 당신의 작록을 주고, 또한 왕명도 없이 그 사람도 당신에게서 작록을 받을 수 있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 푸아티에 전투   732년 : 이 전투로 이슬람의 세력이 프랑스 남부에서 멈춤.

- 흔히 이슬람인들은 “한 손에는 칼, 한 손에는 코란”을 들고, 정복한 자들에게 믿음을 강요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것이다. 이슬람의 성경인 코란은 “종교에는 강요가 없나니라”(2:256)라고 말하면서 명확하게 이슬람의 종교를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더욱이 이슬람인들은 초기 팽창과정에서 다른 민족들을 개종시키는 일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아랍인들은 피정복민이 개종하지 않기를 바랐으며, 그럼으로써 지배자 및 세금징수자 집단으로서 자신들의 위상을 견고히 하고자 했다. 아랍인들은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고, 당시의 다른 지배자들보다 세금을 더 적게 거두었기 때문에 피정복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역사보다 재미있는 것은 없다, 정기문, 신서원, 2000>

 

* 샤를마뉴(Charlemagne, 742경. 4. 2~814. 1. 28 아헨(엑스라샤펠)) 프랑크 왕국의 왕(768~814 재위).   

   

   

   

4월 25일 월요일

These trees shall be my books. <As You Like It, II ii, 5>

이 나무들은 나의 책이다.

 


 정백용에게

鄭以吾(정이오)

 

二月將闌三月來(이월장란삼월내) : 이월이 지나가면 삼월이 오고

一年春色夢中回(일년춘색몽중회) : 일년 봄철도 꿈꾸듯 돌아가리라

千金尙未買佳節(천금상미매가절) : 천금을 주고도 못 사는 계절

酒熟誰家花正開(주숙수가화정개) : 꽃피는 이 때에 뉘 집에 술 익을까

 


 오늘의 맹자(孟子)

齊人伐燕. 或問曰:  「勸齊伐燕, 有諸? 」

:  「未也. 沈同問 燕可伐與 ? 吾應之曰 , 彼然而伐之也. 彼如曰 孰可以伐之 ? 則將應之曰:  爲天吏, 則可以伐之.

今有殺人者, 或問之曰 人可殺與? 則將應之曰 . 彼如曰 孰可以殺之? 則將應之曰:  爲士師, 則可以殺之. 今以燕伐燕, 何爲勸之哉? 」 

 제나라가 연나라를 정벌하였다. 어떤 사람이 물었다.

 “연나라를 치라고 제나라에 권했다고 합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심동이 묻기를 연나라를 정벌해도 좋겠느냐고 하기에 내가 응하여 ‘좋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런 줄 알고 정벌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일 그때 ‘누가 칠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다면, 나는 ‘하늘의 관리라면 벌할 수 있다’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지금 살인자가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그 사람 죽여 마땅한가’하고 물으면, 즉시 ‘죽여 마땅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가 다시 ‘누가 죽여야 하는가’하고 묻는다면 ‘옥의 관리라면 죽일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제 연나라로써 연나라를 정벌한 것을 무엇 때문에 정벌하라고 권하겠습니까.”


* 730년 경 이태백이 활동을 시작하다.

이백(李白 701∼762)

 

* 흔히 마문대왕이라고 알려진 칼리프 알마문은 813년부터 833년까지 아랍세계를 통치하는 동안 눈부신 문화적 업적을 남겼다. 830년에 그가 세운 ‘지혜의 집’은 세종 때 우리나라에 세워졌던 집현전 같은 학문 연구 기관으로, 특히 그리스의 과학이나 다른 학문 서적들을 아랍 말로 번역하는 데 큰 공을 남겼다.

 이 일에 가장 뚜렷한 공을 남긴 사람으로 후나인 이븐이샤크(809~873)라는 기독교도를 들 수 있다. 그는 90명의 조수를 데리고 번역에 몰두했고, 그가 죽은 다음에는 그의 아들이 이 일을 계속했다. 이 번역서들 가운데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과학책들이 있고, 히포크라테스와 갈렌의 의학책도 있었다. 그 후 그리스어의 원래의 책은 없어지고, 아랍어 번역본만 후세에 전한 경우도 많다.

 아랍 왕실에서 번역자들에게 아주 좋은 대우를 베풀어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정말인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후나인이 번역을 하면 그 대가로 그가 번역한 책의 무게와 같은 무게의 황금을 그에게 상금으로 주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임성삼; 현재 황금 1g이 대략 만원 정도이므로 현재의 번역 대가도 이와 아주 다르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 당시는 주로 양피지를 사용하였으므로 현재보다 무게가 대단히 더 많습니다.]

<재미있는 과학이야기, 박성래, 한국학술정보, 2002>

 

* 최치원(崔致遠 857~?(문성왕 19~?))

궁예(弓裔 ?~918 (?~신라 경명왕 27)) 후고구려를 건국한 왕(901~918).

왕건(太祖, 877~943(헌강왕3~태조26))   66세  (재위 918~943).

   

    

 

4월 26일 화요일

The art itself is Nature. <The Winter's Tale, IV iv, 97>

예술 그 자체가 자연이다.


 

유채 밭에서

꽃 놀이에 재롱인

참새들

                                                 마쓰오 바쇼오(1644~1694)

 

<일본인의 시정 하이쿠 편, 박순만 역편, 성문각, 1985>   


 오늘의 맹자(孟子)

 9. 잘못의 정당화

  燕人畔. 王曰:  「吾甚慚於孟子. 」 

 연나라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말했다.

 “나는 맹자에게 심히 부끄럽다.”

 

陳賈曰:  「王無患焉. 王自以爲與周公, 孰仁且智? 」

王曰:  「惡! 是何言也? 」 曰:  「周公使管叔監殷, 管叔以殷畔. 知而使之, 是不仁也; 不知而使之, 是不智也. 仁智, 周公未之盡也, 而況於王乎? 賈請見而解之. 」 

 진가가 말했다.

 “임금께서는 근심하실 것이 없습니다. 임금께선 스스로를 주공과 더불어 비교하여 볼 때 어느 쪽이 더 어질고 지혜롭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 그게 무슨 말인가?”

 “주공은 관숙을 시켜서 은나라를 감독하도록 하셨는데, 관숙은 은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럴 줄 알면서 시켰다면 이것은 어질지 못한 것입니다. 이럴 줄 알지 못하고 시켰다면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인자하고 지혜로운 주공으로도 다 할 수 없었는데, 더구나 임금께서야 더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제가 맹자를 만나보고 해명하겠습니다.”


 * 940년 경 중국의 담초가 렌즈에 대해 실험한 경험을 기록했다.

 1117년 유기가 쓴 책에도 안경에 대한 내용이 있다. 재판관들이 범죄 사건을 적은 내용을 읽기 위해 확대경을 사용했고, 증언에 대한 자신들의 반응을 피고에게 숨기기 위해 연수정의 흑안경을 착용했다고 적었다.

 1271년에서 1297년까지 중국에 머문 마르코 폴로가 “원나라의 늙은 신하들은 거북의 등 껍질 테의 볼록렌즈 안경을 끼고 있다”고 동방견문록에 적었다.

 13세기 로저 베이컨이 볼록렌즈를 실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베니스로 전해져 그곳에서 안경이 발명되었다고 전한다. 플로렌스의 귀족 살비노 다메이토의 묘비에 1285년경 도미니코 만니가 최초로 안경을 발견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살비노는 실존 인물이 아니고 다메이토가가 조작한 것이라고 밝혀졌다.

<깜짝 힌트 왕발명, 홍성모, 세창출판사, 1999>중화

   

    

    

4월 27일 수요일

God is our fortress. <헨리 6세, 1부, II i, 26>

신은 우리들의 요새(要塞)이다. 


 

사뿐사뿐

황매화가 진다.

폭포 소리...

                                            마쓰오 바쇼오(1644~1694)

 

<일본인의 시정 하이쿠 편, 박순만 역편, 성문각, 1985>

 


 오늘의 맹자(孟子)

 見孟子問曰:  「周公何人也? 」 曰:  「古聖人也. 」 曰:  「使管叔監殷, 管叔以殷畔也, 有諸? 」 曰:  「然. 」 曰:  「周公知其將畔而使之與? 」 曰:  「不知也. 」  「然則聖人且有過與? 」 曰:  「周公, 弟也; 管叔, 兄也. 周公之過, 不亦宜乎? 

 맹자를 만나 물었다.

 “주공은 어떤 사람입니까?”

 “옛날 성인입니다.”

 “관숙을 시켜 은나라를 감독하게 했는데 관숙이 은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습니다.”

 “주공은 그가 장차 반란을 일으킬 것을 알면서도 벼슬을 시킨 것입니까?”

 “몰랐습니다.”

 “그러면 성인도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까?”

 “주공은 동생이고 관숙은 형입니다. 주공의 잘못은 의당 있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且古之君子, 過則改之; 今之君子, 過則順之.

古之君子, 其過也, 如日月之食, 民皆見之; 及其更也, 民皆仰之.

今之君子, 豈徒順之, 又從爲之辭. 」 

옛날 군자는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지금의 군자는 그 잘못을 그대로 밀고나갑니다.

옛날의 군자는 그 잘못이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백성들이 그것을 보고, 그것을 고치게 되면 백성들이 다 우러렀습니다.

지금의 군자는 잘못을 그대로 밀고 나갈 뿐 아니라, 그 잘못을 변명하기까지 합니다.”


* 강감찬(姜邯贊, 948~1031)   83세

 

* 1045년 송나라의 책 “무기 총람” 흑색 화약이 나옴.

- 1232년 금나라 비화창; 200 m를 날아 반경 6 - 7 m를 불바다로

   진천뢰; 수류탄의 일종

- 846년 그리스의 연금술사 마르쿠스 그래쿠스; 초석 목탄 유황을 6:2:1

- 1267년 영국의 로저 베이컨은 그래쿠스의 비법을 전수받아 1:1:1로 흑색화약을 제조하는 방법을 암호로 기록

- 1313년 독일의 슈바르츠가 베이컨의 암호를 해독하여 대포 제조

- 1450년 투르크족이 동로마를 멸망시킴; 모하메드 2세는 길이 5m, 무게 19톤, 구경 60cm, 360kg의 포탄을 550m까지 발사하는 대포 13문을 동원하여 콘스탄틴노플의 성벽을 파괴.

 대포 하나의 운반을 위해 140마리의 황소, 200명의 병사.

 두 달간 모두 합해 4000여 발의 포탄이 발사됨. [임; 대포 하나당 하루에 몇 발 정도]

 

   

4월 28일 목요일

They should be good men, their affairs as righteous;

But all hoods make no monks. <헨리 8세, III i, 22>

선량한 사람이 되고, 옳은 일을 해야 한다.

승복만 입었다고 승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촌경(村景) 

 

노천명

 

 

구릿빛 팔에 쇠스랑을 잡고

밭에 들어 검은 흙을 다듬는 낫

 

보기 좋게 낡은 초가집 영마루엔

봄이 나른히 기고 -

울파주 밖으론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웃는다

 


 오늘의 맹자(孟子)

 10. 부귀를 원하는가

  孟子致爲臣而歸.

 맹자는 신하로 있던 것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하였다.

 

王就見孟子, 曰:  「前日願見而不可得, 得侍, 同朝甚喜. 今又棄寡人而歸, 不識可以繼此而得見乎? 」 對曰: 不敢請耳, 固所願也. 」 

 왕이 맹자를 만나보고 말했다.

 “일전에 만나보기르르 바랬으나 만나볼 수 없었는데 그 후 조정에서 같이 모실 수 있어 매우 기뻤습니다. 이제 과인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니 앞으로 계속 만나볼 수 있을지 모르겠소.”

 “감히 청할 수 없으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임성삼; ‘불감청이나 고소원’의 어원인가? 不敢請耳, 固所願也]

 

他日, 王謂時子曰:  「我欲中國而授孟子室, 養弟子以萬鍾, 使諸大夫國人皆有所矜式. 子盍爲我言之? 」 

 훗날 왕이 시자에게 말했다.

 “나는 나라 한 가운데 맹자의 집을 마련해 주고, 만 종(鍾)으로써 제자를 기르게 하여 여러 대신들과 나라의 백성들이 다 존경하며 본보기가 되도록 해주고 싶다. 내 말을 자네가 전해다오.”

 

時子因陳子而以告孟子, 陳子以時子之言告孟子. 

 시자는 이 말을 진자에게 전하고 진자는 이 말을 맹자에게 고했다.


* 11 세기?; 나침반의 발명;

중국에는 4 세기 경 갈홍의 <포박자>에 바늘을 물에 띄울 수 있다는 표현이 나오고,

11 세기 심괄의 <몽계필담>에 자석의 바늘이 남과 북을 가리키는데, 진북과 자북이 다르다는 내용이 있다. 이러한 문헌들로 보아 적어도 11 세기에는 이미 자석이 나침반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임성삼; 기원전 8 세기의 책에는 황제(黃帝; 기원전 3000년 경)때 황제가 외출할 때 제일 앞에 지남(指南)차가 있고, 그 뒤에 바퀴의 회전수를 측정하여 그날 간 거리를 계산하는 수레가 따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아 적어도 기원 전 8 세기에 나침반이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유럽에서는 1190년부터 나침반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4월 29일 금요일

Those that will haste will make a mighty fire

Begin it with weak straws. <Julius Caesar, I ii, 107>

급히 큰 불을 일으키려는 사람도

시작은 지푸라기 모닥불로 한다.

<셰익스피어 명언집, 이태주 편역, 범우사, 2000>   


 겸손의 향기

 

                                     이 해 인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역겨운 냄새가 아닌

향기로운 말로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우리의 모든 말들이

이웃의 가슴에 꽂히는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는

험담과 헛된 소문을 실어나르지 않는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말을 하게 하소서

 

나보다 먼저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사랑의 마음으로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보다는

좋은 점을 먼저 보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한포기의 난초를 가꾸듯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올린

지혜의 맑은 물로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겸손히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오늘의 맹자(孟子)

孟子曰:  「然. 夫時子惡知其不可也? 如使予欲富, 辭十萬而受萬, 是爲欲富乎?

맹자가 말했다.

 “그래, 시자로서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없으리라. 내가 만일 부자되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10만 종을 사양하고, 만 종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이 부를 바라는 것이 되겠다고 생각하는가?

 

季孫曰:  異哉子叔疑! 使己爲政, 不用, 則亦已矣, 又使其子弟爲卿. 人亦孰不欲富貴? 而獨於富貴之中, 有私龍斷焉.

 계손이 이렇게 말했다. ‘자숙의는 이상하다. 자신이 정치를 하다가 일을 할 수 없으면 스스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될 일인데도 자기의 자제까지도 경(卿) 벼슬을 하도록 시켰다. 사람으로서 또한 그 누가 부귀를 원하지 않겠는가. 혼자서 부귀 가운데 있어서 사사로이 농단(壟斷, 독점)한단 말인가.’

 

古之爲市也, 以其所有易其所無者, 有司者治之耳. 有賤丈夫焉, 必求龍斷而登之, 以左右望而罔市利. 人皆以爲賤, 故從而征之. 征商, 自此賤丈夫始矣. 

옛날 시장이라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것과 바꾸는 것이고, 관리는 다스릴 뿐이었다. 그런데 못난 사나이가 있어, 반드시 높은 언덕에 올라가, 좌우를 두루 살피며 시장의 이익을 독점했다. 사람들은 이 사나이를 모두 천하게 여겼다. 이런 까닭에 세금을 받게 되었다. 장사꾼에게 세금을 받게 된 것은 이 천한 사나이에게서부터 시작됐다.”

[임성삼; 농단(壟斷)의 뜻을 맹자가 설명한 것입니다.]


 * 1202년 피보나치(Fibonacci; 보나치 가문의 아들, 이탈리아의 상인, Leonardo Pisano, 본명은 Leonardo Fibonacci, 1170 피사(?)~1240 이후)가 대수와 오늘날 힌두-아랍 숫자를 사용한 교과서를 출판하였다.

- 피보나치 수열; 1, 1, 2, 3, 5, 8, 13, 21, 34, 55, ... (앞의 두 항의 합)

 이 수열은 깜짝 놀랄만큼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도 발견되며, 그 응용 범위는 파인애플 세포의 성장에서부터 유전 효과에 이르기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다. 이 수열에서 얻어지는 부산물이 끝없이 많으므로 현재 미국에서 <계간 피보나치>라는 잡지가 발간되고 있다.

[임성삼; 서양에서 중세동안에 수학에서 이룬  거의 유일한 진보]

<π의 역사, 페트르 베크만 지음, 박영훈 옮김, 실천문학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