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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목요일

남몰래 하는 선행은 땅속을 흐르며 대지를 푸르게 가꾸어 주는 지하수 줄기와 같은 것 <토마스 칼라일>

그대를 생각하며

월산대군

여관의 등잔불 흐릿한 새벽 旅館殘燈曉

호젓한 성엔 가을 비 내리네. 孤城細雨秋

그대 생각하는 마음 끝이 없는데 思君意不盡

천리를 흘러가는 큰 강물이여. 千里大江流

오늘의 맹자(孟子)

詩云: ‘商之孫子, 其麗不億. 上帝旣命, 侯于周服. 侯服于周, 天命靡常. 殷士膚敏, 祼將于京.’ 孔子曰: ‘仁不可爲衆也. 夫國君好仁, 天下無敵.’

시경에 말했다.

상나라 자손이 그 수 몇 십 만인지 모르겠지만

상제께서 이미 명령하신지라 주(周) 나라에 복종하였다.

주 나라에 복종하였으니 천명은 무상하구나.

은 나라의 훌륭한 신하들 서울에 와서

술을 땅에 부으며 주나라의 제사를 돕는구나.

공자님이 말씀하셨다.

‘어짊에는 많은 수효로 대적할 수 없다. 대체로 한 나라의 임금이 어진 것을 좋아하면, 천하에 적이 없게 된다.’

[임성삼; 천하무적의 원전(原典)이라고 생각합니다.]

* 한번은 어느 요정에서 어른 한 분을 소개받았다. 중간에 선 분이 “두 분 일가간이실텐데 인사들 하슈”하길래 상대가 존장뻘이라 나는 정중하게 손을 짚고

“저 이훈종이올시다.”

그랬더니 그 어른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면서

“나 OO예요.”

‘아차 실수했구나!’하는데 맞은편에 앉은 이십 안짝으로밖에 안 보이는 접대부가 내게 눈을 흘긴다.

통성명 끝에 따르는 몇 가지 대화가 끝나고 술자리가 제법 어우러졌을 때 나는 그 애를 불러앉혔다.

“너 요년, 어른들 말씀하시는데 왜 눈깔을 흘겼니?”

“일가간이라는데 왜 성을 넣어서 말씀하셔요?”

그 말 나올 줄 알았던 것이지만, 고만 나이에 깜찍하게 그런 것을 다 아는게 대견해서, 성명과 생장과정을 캐물으렸더니 잡혔던 손을 뿌리치고 도망가서 좌석이 끝나도록 내 곁엔 오지 않았다. 그런 좌석에 나오는 처지에 근본을 밝히기가 역겨웠던 것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2일 금요일

애매한 친구보다는 차라리 분명한 적이 낫다. <탈무드>

그림 부채에

월산대군

가을 바람 속의 누른 단풍잎,

푸른 산 머리론 해가 기우네.

아득한 강남은 어느 곳인가,

배 한척이 느릿느릿 가고 있구나.

오늘의 맹자(孟子)

今也欲無敵於天下而不以仁, 是猶執熱而不以濯也. 詩云: ‘誰能執熱, 逝不以濯?’ ｣

지금 제후들은 어질지 않으면서 천하에 적이 없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은 마치 뜨거운 것을 손에 쥐고서도 물에 담그지 않는 것과 같다.

시경에 말했다.

누가 뜨거운 것을 손에 쥐고서도

물에 담그지 않을 수 있는가?”

* 옛날엔 통성(通姓)이라는 게 있었다. 같은 주막에서 밥 사먹다 사귀어 한나절 같은 길을 걷게 되었을 때, 서로 성이나 알고 지내면 될 그런 사이의 인사다.

“알고나 지냅시다. 나 제천 사는 김서방이오.”

“난 안성사는 송참봉이라고 하오. 평안하시오?”

“평안하시오?”

벼슬 경력이 없을 때는 그냥 O서방이고, 하잘것없는 지위라도 직함이 있으면 얹어서 호칭한다.

- 그런데 요새는 모조리 통성명이다.

- 통성이나 통성명 후에는 꼭 안부를 물어야 하는 법이다. 연령이 비슷하면 “평안하오?” “평안하시오?”

나이차가 나면 “안녕하십니까?”고 교환하는데 과공(過恭)이 비례(非禮)라고 평교간에 안녕은 격에 안 맞지만 모두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

- 중간에 사람이 들어서 소개하든지 했을 때는 의당 서로 알 만한 처지일 것이라, 약간의 치사를 넣는다.

“성화(聲華)는 익히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좀더 친숙해질 조건이 있으면, 구체적으로 들어서 격의없이 통하면 된다.

“거 ‘우리문화’에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 면대해 뵙기는 처음입니다마는 OO군을 통해서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 일상 사교계에서는 그만하면 족할 것을, 장가를 들러 간다든지 하면 공연히 까장스럽게 군다. 상대방을 떠보느라고 공연히 유식한 체 평소에 안 쓰는 용어를 들먹여 괴롭힌다.

“관향이 어디시죠?”

“예? 관향이라니요?”

하는 날이면 교양 정도에 바닥이 난다. 관향이라면 호적에 나오는 흔히 말하는 본이라는 것이다. 한번은 새로 부임해간 학교에서 아주 착해보이는 학생이 있기에 물었다.

“너 이름이 뭐지?”

“성OO입니다.”

“어디 성가냐?”

“예?”
“본이 어디냐 말이야.”
“그런 거 잘 몰라요.”

“그 정도는 알아야지. 고등학교까지 다니면서 그런 것도 몰라서야 쓰노?”

학생은 아주 머쓱해서 돌아갔다.

이튿날 교정에서 마주쳤더니 익살스럽게 웃으면서 그런다.

“우리 아버지 말씀이 선생님더러 오히려 무식하시다고 해요. 성(成)씨는 창녕(昌寧) 한 본뿐이라고 하셔요.”

이번엔 내가 밀리면서도 기어이 한 마디 했다.

“그건 그렇다치고, 저의 성을 말할 때는 씨라 안하고 성(成)가라고 하는 법이야.”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5일 월요일

교사의 임무는 독창적인 표현과 지식의 희열을 불러 일으켜주는 일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망천에서 한가하게 살면서 배수재에게 드립니다

왕유(王維;?699-761?)

寒山轉蒼翠,(한산전창취),차가운 가을 산이 검푸르게 변하고

秋水日潺湲.(추수일잔원),가을 물은 날마다 졸졸 흐른다

倚杖柴門外,(의장시문외),지팡이 짚고 사립문 밖에 나아가

臨風聽暮蟬.(림풍청모선).바람 쏘이며 저문 매미소리를 듣는다

渡頭餘落日,(도두여낙일),나룻머리에 지는 햇살은 남아있고

墟里上孤煙.(허리상고연).작은 마을에는 외로운 연기만 피어오른다

復値接輿醉,(복치접여취),다시 접여처럼 술이 취하여

狂歌五柳前.(광가오류전).오류선생 집 앞에서 미친 듯 노래부른다

오늘의 맹자(孟子)

8. 후회는 자기 자신에게 원인이 있다.

　　孟子曰: ｢不仁者可與言哉? 安其危而利其菑, 樂其所以亡者. 不仁而可與言, 則何亡國敗家之有?

맹자가 말했다. 어질지 못한 사람에게 말을 해도 소용 없다.

[그들은] 위태로운 것을 편안히 여기고 해로운 것을 이롭게 여기며 망하게 될 일을 즐거워한다.

어질지 못한데도 말할 수만 있다면 나라를 망치고 집을 패하게 하는 일이 어찌 있겠는다.[임; 문맥이 이상하다.]

* 직장 동료와 그의 친구라는 이의 집을 방문했더니, 성은 이씬데 가풍이 조금 묘하다. 술상을 차려 내왔는데 안방문이 열리면서 예쁘게 생긴 아기들 삼남매가 병아리떼 모양 종종종종 걸어들 오고 저 아버지가 상의 것을 이것저것 집어주니까 그것을 먹으면서 종종종 돌아들 가더니, 또다시 종종종. 내가 새삼스레 물었다.

“같은 이가끼리인데 선생 관향은 어디시죠?”

주인이 대답하는데 생전 들어보지도 못하던 본이다. 그런데 같이 간 친구가 내 발을 툭 쳐서 더 이상 묻지 말라는 신호를 보낸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나를 나무라듯 말했다.

“애들 버릇 가르쳐 놓은 거 보면 알조지, 본은 물어봐 뭘 해?”

“그래서 물어봤던 거야.”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6일 화요일

국민이 내일에의 신념을 갖지 않으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

어둑한 가을날의 산 속 생활

왕유(王維;?699-761?)

空山新雨后,(공산신우후), 쓸쓸한 산에 비 내린 뒤

天氣晩來秋.(천기만내추). 때는 늦어 가을이네

明月松間照,(명월송간조), 밝은 달빛은 소나무 사이로 비춰들고

淸泉石上流.(청천석상류). 맑은 샘물 돌 위로 흐른다

竹喧歸浣女,(죽훤귀완녀), 대숲 소란하더니 빨래하던 처녀 돌아오고

蓮動下漁舟.(련동하어주). 연꽃 움직이더니 고깃배 내려간다

隨意春芳歇,(수의춘방헐), 제멋대로 자란 봄풀 시들어가는데

王孫自可留.(왕손자가류). 왕손도 스스로 머물 만 하네

오늘의 맹자(孟子)

有孺子歌曰: ‘滄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어린이들이 노래부르기를 ‘창랑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르면 내 발을 씻으리라’하였다.

孔子曰: ‘小子聽之! 淸斯濯纓, 濁斯濯足矣, 自取之也.’

공자가 말하기를 ‘어린이들의 저 노래를 들어 보아라.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면 발을 씻는다 하니 물 자체가 그렇게 한 것이다’하였다.

* 오늘 동아일보; 백홍렬 박사 투고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은 2005년 한국의 과학경쟁력은 세계 15위, 기술경쟁력은 세계 2위라고 발표했다.

* 성과 관향을 알고 나면 가계(家系)를 좀더 자세히 알려고 묻는 수가 있다. 우리 고장의 오씨 한분은 공부를 못해 글도 모르고, 가문에 대해서는 더구나 캄캄한 분이었다. 집안 아이가 시집가는데 후행(後行)으로 따라가 그곳 새 사돈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뉘 댁이시오?”

다짜고짜 상대방 성명을 묻는 것은 실례지만 짓궂게 일부러 그러는 수가 있다.

“오아무개올시다.”

“어디 오씨시오?”

“해주 오가올시다.”

거기까지는 무사통과다.

“뉘 자손이시오?”

“촌 무지랭이가 그런 걸 어찌 알겠습니까?”

하면 배짱도 보이고 좋았을 것을, 모른다면 안 되는 줄 알고 한다는 말이

“오성 자손이올시다.”

이 얘기는 사방 파다하게 퍼져서 늙어 돌아갈 때까지 오성대감이란 별명을 달고 다녀야 했다.

오성이라면 경주 이씨의 이항복, 임진왜란 때 명재상으로 별호는 백사(白沙), 나라에 공로가 크다고 그의 관향인 경주의 고호(古號)를 따 오성부원군을 봉했기 때문에 생긴 호칭인데, 언제부터 그의 자손이 됐는지? 딱한 얘기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7일 수요일

논쟁에는 귀를 기울여라. 그러나 논쟁에 끼어들지 않도록 하라. 아무리 작은 말이라 할지라도 노여움이나 격정이 일어난다는 것을 경계하라. <고리키>

숭산에 돌아가며 시를 짓다

왕유(王維;?699-761?)

淸川帶長薄,(청천대장박), 맑은 개울 긴 숲 끼고

車馬去閑閑.(거마거한한). 수레 타고 한가히 간다

流水如有意,(류수여유의), 흐르는 물은 무슨 마음 있는 듯 하고

暮禽相與還.(모금상여환). 나는 저녁 새와 함께 돌아온다

荒城臨古渡,(황성림고도), 황폐한 성은 옛 나루에 접해있고

落日滿秋山.(낙일만추산). 지는 햇빛 가을 산에 가득하다

迢遞嵩高下,(초체숭고하), 멀리 숭산 아래로 찾아들어

歸來且閉關.(귀내차폐관). 내집에 돌아와 문을 닫는다

오늘의 맹자(孟子)

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家必自毁, 而後人毁之; 國必自伐, 而後人伐之.

사람이 반드시 스스로 후회한 다음에야 남이 그를 모욕하고,

집안은 반드시 자신이 파괴한 다음에야 남들이 파괴하게 된다.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가 토벌되게 된 뒤에야 남이 그 국가를 토벌한다.

* 어느 혼인 잔치에 갔다가 후행이 앉은 방에 인도되어 그와 대좌하게 됐는데, 이 친구가 도무지 입을 떼지 않는다. 내가 하는 얘기에 공감이 가면 “예!” 의견이 안 맞거나 모르겠으면 “글쎄올시다”가 고작이다. 그냥 답답해 뛰쳐나와 안마당에서 색시방이나 후행방에서도 들리게 커다란 소리로 말했다.

“OO실에는 사람도 없나보다. 어디서 벙어리를 후행으로 딸려보냈게.”

그랬더니 그 댁 노인이 웃으면서 한 말씀 하신다.

“가만 둬라. 그래도 그게 중은 되는 것이니라.”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8일 목요일

누구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고, 누구를 위해서도 입을 열지 말라. <윌리엄 셰익스피어>

가을 커피

용혜원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는

가을 도시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은행잎 하나

띄워 마시면

이 가을을

마실 수 있을까

하늘에서

푸른 물감이

커피잔에 뚝 떨어져

고독에 물든

마음의 색깔을 바꿀 수 있을까

입술에 젖어오는

쓴맛과 단맛

프림의 조화를 이루는

그날의 커피는

가을색으로 물들었다

오늘의 맹자(孟子)

太甲曰: ‘天作孽, 猶可違; 自作孽, 不可活.’ 此之謂也. ｣

서경 태갑편에 말했다.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으나,

자신이 부른 재앙은 벗어날 길이 없다’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 신부 측에서는 한분을 뽑아 신랑의 신변을 맡긴다. 사랑에서

“구경하(具慶下)십니까?”

신랑이 얼굴이 빨개지며 “무얼 구경하라는 거예요?”하면,

“그게 아니라 부모님이 다 계시냐는 거니까, 거기 맞게 대답하면 돼.” 뚱겨줘서 대답한다.

“양친(兩親)시하(侍下)올시다.”

아버지밖에 안 계시면 “엄(嚴)시하(侍下)올시다.”

어머니만 계실 때는 “편모(偏母) 슬하(膝下)올시다.”

그도 아니고 다 돌아가셨으면, “영감하(永感下)올시다.”

- ‘엄처시하는 아니냐’고 빈정거리는 놈이 있을 것에 대비해 미리 가르쳐준다.

“초면에 그런 말씀하시는 건 실례 아닐까요?”

- “안행(雁行)‘이 어찌 되십니까?”

기러기가 차례를 따라 날 듯이 형제가 몇이나 되느냐는 것을 이렇게 묻는다.

“오형제 중의 셋째입니다.”

이 정도까지의 문답을 통과하면, 고 신랑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고, 뒤미처 성찬으로 차린 상을 내다가 같이 나눠먹으며 논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9일 금요일

다정하고 조용한 말은 힘이 있다. <에머슨>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용 혜 원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언제나 웃으며 친절하게 대하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베풀줄 아는 마음을 가진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아픔을 감싸주는 사랑이 있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약한 자를 위해 봉사할 줄 아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병든 자를 따뜻하게 보살피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늘 겸손하게 섬길 줄 아는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오늘의 맹자(孟子)

9. 인심을 얻으려면

　　孟子曰: ｢桀紂之失天下也, 失其民也; 失其民者, 失其心也. 得天下有道: 得其民, 斯得天下矣; 得其民有道: 得其心, 斯得民矣; 得其心有道: 所欲與之聚之, 所惡勿施爾也.

맹자가 말했다.

“걸(桀), 주(紂)가 천하를 잃은 것은 백성을 잃었기 때문이다.

백성을 잃은 것은 백성들의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천하를 얻는 데는 도가 있다.

백성들을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

백성들을 얻는 데도 도가 있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으면 백성들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데도 도가 있다.

백성들이 바라는 것을 모아다가 주고 백성들이 싫어하는 것을 베풀지 않도록 할 뿐이다.

* 우리 트고 지내세

어떤 점잖은 자리에서 초면 친구 하나가 나한테 실없는 소리를 하길래, 내가 묻기 시작했다.

“노형, 하동(夏冬)은 어떻게 됐소?”

“하동이라니?”

“이 양반아! 춘추(春秋)가 나이면, 하동도 나이겠지?”

그는 잘못 건드렸다 싶든지 조용히 연령을 댄다.

“예순셋이오.”

“그럼 등찬 나던 해에 났구료.”

“등창이 나다니?”

“이 사람아! 그 나이면 병진(丙辰)생인데, 병을 등에 졌으면 등창 난 것이지 별거여?”

“온 사람도...”

“내가 조금 밑지네만, 우리 트고 지내세.”

이리해서 그하고는 스스럼없는 사이가 되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12일 월요일

상상력을 안 가진 정신은 망원경을 안 가진 천문대 같다. <헨리 포드 피처>

가을을 파는 꽃집

용 혜 원

꽃집에서

가을을 팔고 있습니다

가을 연인같은 갈대와

마른 나무가지

그리고 가을 꽃들

가을이 다 모여 있습니다

하지만

가을 바람은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거리에서 가슴으로 느껴 보세요

사람들 속에서도 불어 오니까요

어느 사이에

그대 가슴에도 불고 있지 않나요

가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

가을과 함께 하고 싶은 사람들은

가을을 파는 꽃집으로

다 찾아오세요

가을을 팝니다

원하는 만큼 팔고 있습니다

고독은 덤으로 드리겠습니다

오늘의 맹자(孟子)

民之歸仁也, 猶水之就下̖ 獸之走壙也.

백성들이 어진 덕에 귀복하는 것은 물이 낮은 데로 흐르며 짐승이 광야를 달리는 것과 같다.

故爲淵敺魚者, 獺也; 爲叢敺爵者, 鸇也; 爲湯武敺民者, 桀與紂也.

이런 까닭에 연못으로 고기를 내모든 것은 수달이며 새떼를 숲으로 내모는 것은 새매이다. 백성들을 탕왕과 무왕에게 몰아다가 준 것은 걸과 주이다.

* 향당(鄕黨)막여치(莫如齒)라고 벼슬길이 아닌 민간에서는, 매사를 나이로 따져 서열매기는 것이 우리의 전통이다. 그래 배년(倍年)이 장(長)즉 부사지(父事之)요, 십년이 장즉 형사지(兄事之)하며, 오년이 장즉 견수지(肩隨之)라 하여 많은 규제가 여기서 생겨났다.

나이 20이면 성년이니까, 그 갑절 즉 20년 이상 차가 지면 부집존장(父執尊長)이라 하여, 서로 모르는 사이라도 맞담배는 피우지 않는 등 상대를 높여서가 아니라 자신의 처신으로 지켜야 하는 법이다.

십년 이상 차가 지면 노형(老兄)소제(小弟) 사이라, 응분의 서열은 지켜야 하기 때문에 서로 자네니 내니 하는 것도 9년까지 한도로 친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 말을 놓아 하는 것을 벗한다, 농한다, 또는 트고 지낸다 하는데, 서로 가문을 봐가며 트되, 상대가 옛날식으로 따져 계급이 떨어져 서먹서먹해할 때는 일부러 이쪽에서 터주어서 격의 없이 지내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13일 화요일

대화할 때의 신중함은 웅변 때보다 더 중요하다. <그라시안>

가을 단상

용 혜 원

한 잎 낙엽이 떨어질 때부터

가을은 시작하는 것

우리들 가슴은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거리로 나서고

외로움은 외로움 대로

그리움은 그리움 대로

낙엽과 함께 날려 갑니다

사랑은 계절의 한 모퉁이

공원 벤취에서 떨리는 속상임을 하고

만남은 헤어짐을 위하여 마련되듯

가을이 푸른 하늘을 떠나갈 무렵

호주머니 깊이 두 손을 넣은 사내는

어느 골목을 돌며 외투깃을 올리고

여인들은 머플러 속에

얼굴을 감추고 떠날 것입니다

모든 아쉬움은 탐스런 열매들을 보며

잊혀져가고 초록빛들이 사라져갈 무렵

거리엔 빨간 사과들이 등장할 것입니다

오늘의 맹자(孟子)

今天下之君有好仁者, 則諸侯皆爲之敺矣. 雖欲無王, 不可得已.

지금 어진 것을 좋아하는 임금이 있다면 제후들은 백성을 그에게 몰아 줄 것이다. 비록 왕이 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왕이 되고 말 것이다.

* 옛날엔 조출(早出)이 많아서 20안에 낳은 아들도 흔히 있었는데 한분이 나이 몇 살 틀리지 않건만 친구의 아들이라고 자기에게 말을 놓아 하는 분들의 생년월일을 따져보았다. 그리하여 나이가 자기 쪽으로 가까운 몇 분을 정초에 집으로 청하였다. 떡국과 술로 잘 대접하고 나서 허두를 꺼낸다.

“여보게들...”

“아니! 저놈이 아비 친구를 몰라보고...”

아들은 유들유들하게 문갑에서 문서를 꺼내 펴보인다.

“여기까지는 아버지 편으로 가깝고, 여기 이 자네 이름부터는 내 쪽으로 가까워. 여러 말 말고 오늘 새해부터는 나하고 트고, 들어가 아버님 뵙고들 가게.”

지금은 퇴색한 말이지만 인물이 틀지고 위엄 있으면 ‘거방지다’고 하는데, 주인이 워낙 거방진데다 이치에 밀리는지라, 여럿은 안사랑으로 예전 벗하던 친구를 찾아 세배를 드렸다.

“방금 자제하고 트고 어르신네껜 트는 것을 무르러 들어왔습니다.”

“?!”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14일 수요일

많은 사람이 충고를 받지만 오직 현명한 자만이 충고의 덕을 본다. <푸블릴리우스 시루스>

나무 의자

용 혜 원

나무 의자에 앉아

책을 읽다 생각에 빠진다

어느 숲 속의

나무였을까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몇 번이나 지냈을까

어느 새가 날아와 앉아

울고 갔을까

어떤 짐승이 보금자리를

틀고 싶어했을까

나무는 자라가면서

무엇들을 바라보았을까

나무는 여름날 그늘을

잘 만들어 주었을텐데

목수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며 만들었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의자에 피곤을 기대고 앉아

잠이 들어버렸다

꿈 길에서 큰 나무를 만났다

오늘의 맹자(孟子)

今之欲王者, 猶七年之病求三年之艾也. 苟爲不畜, 終身不得. 苟不志於仁, 終身憂辱, 以陷於死亡.

지금 왕이 되려는 사람들은 7년 된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려고 하는 것과 같다.

미리 비축하여 두지 않으면 종신토록 얻지 못할 것이다.

어진 데에 뜻을 두지 않으면 종신토록 우울과 욕됨의 함정에서 사망하고 말 것이다.

詩云 ‘其何能淑, 載胥及溺’ , 此之謂也. ｣

시경에 말했다.

그 어찌 착하다 할 수 있으리

곧 서로가 다 깊은 물에 빠져 버리리라

이것을 일컬은 것이다.”

* 시골서는 사람이 길 가다 개울 좀 건네달라고 할 제, 그냥 업어 건네주는 것이 통례였다. 한 사람이 청년 하나를 불러 월천(越川)을 세워 업혀가면서도 미안한 감이 있어

“젊은 친구 어느 동네 살우?”

“예, 예실 삽니다.”

“그럼 구씨겠구랴?”

“예!”

“그럼 제순 씨라고 내 동접이 있는데 그 어른과는 어떻게 되오?”

“그 어른 제 백부십니다.”

“그랴? 그럼 나 놓네.”

말을 놓아 하게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청년이 한잔 했든지 못되게 나온다.

“그랴? 그럼 나도 놓네.”

(그 다음 광경은 상상에 맡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15일 목요일

말하는 것은 지식의 영역이고 듣는 것은 지혜의 특권이다. <올리버 웬들 홈스>

익어가는 가을

이해인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도 익어가네

익어가는 날들은

행복하여라

말이 필요없는

고요한 기도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서

사랑이 되네

<작은 위로, 이해인 시집, 열림원, 2002>

오늘의 맹자(孟子)

10. 자포자기(自暴自棄)

　　孟子曰: ｢自暴者, 不可與有言也; 自棄者, 不可與有爲也. 言非禮義, 謂之自暴也; 吾身不能居仁由義, 謂之自棄也.

맹자가 말했다.

“스스로를 학대하는 사람과는 말할 수 없고, 스스로를 버리려는 사람과는 함께 일할 수 없다.

입만 열면 예의를 비방하는데 이것을 자포라 하고,

자신의 몸은 인의(仁義)에 살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자기(自棄)라 한다.

* 필자가 어렸을 때 웬만한 사람은 이름 외에 통용하는 자(字)를 가졌다. 그래서 자는 부명(副名)이라고도 하는데, 대개는 본명의 덕을 구체화해 짓는 때문에 표덕(表德)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지의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이니 ‘그윽한 덕을 갖췄다’는 뜻이요, 관우를 운장(雲長)이라 함은 ‘구름 밖에 멀리 간다’하는 깊은 뜻이 있다.

그런데 명(名)은 군사부(君師父)만이 부를 수 있고 일반으로는 자(字)를 부르던 것이라, 정인보 선생도 그 자당 편지에서는 경시라는 자로 부르고 있다. 또 중국의 장 총통도 문서에는 중정(中正)이라는 본명으로 서명하고, 일반은 그를 개석(介石)이라는 자로 불렀다. 만약 지금모양 이름이 아무나 부르는 것이었다면, 율곡(이이)이나 사육신 가운데 이개 같은 이는 처신하기 매우 괴로웠을 것이다.

[임성삼; 한메 백과사전에서는 장개석이 본명이라고 나와 있으나, 브리태니커에는 본명이 중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16일 금요일

어떠한 충고일지라도 길게 말하지 말라. <호라티우스>

석류

이 해인

참았다가

터지는 웃음소리

바람에 익힌

가장 눈부신 환희를

엎지르리라

촘촘히 들어박힌

진(眞)홍(紅)의

찬미기도

껍질째로 쪼개어 준

가을별

바람이 좋아

까르르 쏟아지는

찬란한

웃음소리

오늘의 맹자(孟子)

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路也.

어질다는 것은 사람이 편히 쉴 수 있는 집이요,

의롭다는 것은 사람이 올바르게 가는 길이다.

曠安宅而弗居, 舍正路而不由, 哀哉! ｣

편한 집을 비워 놓고 살지 않으며 바른 길을 가지 않으니 슬프다.”

* 이웃에 ‘진구’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었는데, 노인 한 분은 그를 꼭 ‘진규’라고 불렀다. 알고 보니 노인의 할아버지 함자와 같아서 일부러 변형해 부르는 것이었다.

또 지금도 엄격하게 고풍을 지키는 가문에서는 저희 부형의 함자를 낼 때 꼭 ‘무슨 자 무슨 자 하는 분’이라고 하라고 가르치고들 있다. 이것은 아이들 이름 부르듯 하기가 미안해서 그러는 것인데, 이런 것을 휘(諱)한다고 한다.

이럴 때 아무래도 거리낌없이 휘뚜루 쓰기 편한 것에 별호라는 것이 있다. 저희 선생님을 성명 삼자로 쓰기 미안해 ‘화담(花譚) 선생’하면, 화담이란 동네에 사시는 우리 선생님이라는 뜻이다. 그대로 통해서 흉할 것이 없다. 선생님 쪽에서도 제자들이 받고 미안해하지 않게 발신인 난에 ‘화담’이라고 쓰면 되던 것이라, 그래 별호 가운데는 고장 이름을 딴 것이 가장 흔하고 기록에도 제자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적힌 것이 많다. 이승만 박사의 우남은 우뢰재 남쪽에서 성장했다는 뜻이고, 퇴계(退溪), 율곡(栗谷), 사계, 근자의 분으로는 두계(斗溪, 이병도)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특별한 기예를 닦는 분야에서는 선생이 호를 내려주기도 한다. 심전(心田) 화백은 t랑하는 제자 이상범 씨에게 전(田)자를 떼어 청전(靑田), 노수현에게 심자를 붙여 심산(心山)이라고 호를 지어주었고, 이당(以堂: 김은호)도 애제자 안동숙 씨에게 오당(吾堂)이라는 호를 허락하였다.

또 자신의 인생관이나 신조로 호를 삼은 이가 있으니 백범(白凡: 김구, 백의민족의 보통사람 [임; 백정과 보통사람 모두 ]), 고하(古下: 송진우), 일석(一石: 이희승, 자그만 돌 하나로 자처해서) 등이 그것이다.

특히 좋아하는 것으로 지은 것은 송사(宋士; 김화진), 백사(白沙: 이항복), 월사(月沙: 이정구) 등등이 있다.

사는 집이라는 뜻에서 당(堂) 자를 붙인 것, 재(齋)나 암(菴)을 붙인 것이 많다. 평양의 황고집으로 유명한 황순승(黃順承)은 별명을 싫게 아니 여겨 스스로 집암(執巖)이라고 하였더란다.

이밖에도 별명을 그대로 호로 삼은 것으로는 행인(杏仁: 李承萬, 살구씨만하다는 별명), 웅초(熊超: 김규택, 만화가였는데 뚱뚱한 몸집에 한잔 들어가면 곰처럼 뛴대서 친구들이 붙인 것) 등이 있다.

천재시인 소월(素月)을 놓고 생각해본다. 하얀 달은, 아침 햇살이 퍼지면 맥없이 사라지니 어느 모로 보나 단명(短命)하다. 게다 대면 박종화의 월(月)탄(灘, 여울 탄)은 달에 비치어 그 찬란하게 빛나는 여울에 물결, 역시 오복을 갖춘 기상이 엿보인다.

[임성삼; 여울을 흐르는 물은 달을 비출 정도로 고요하지 않습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19일 월요일

여가를 지적(知的)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의 최대 성과이다. <버트런드 러셀>

[임성삼; 컴퓨터 게임도 지적으로 여가를 활용하는 것일까?]

청춘에 기를 세워라

조병화

청춘에 네 기를 세워라

청춘에 네 그 기를 지켜라

기 아래 네 그 청춘을 엮어라

누구보다 땀 많이 간직한 생명

누구보다 피 많이 간직한 생명

누구보다 눈물 많이 간직한 생명

청춘은 푸른 바다라 하더라

청춘은 푸른 산이라 허더라

청춘은 푸른 하늘이라 하더라

해는 항시 가슴에서 솟아오르고

즐거운 젊은 날

흘러내리는 날 날이 우릴 키운다

청춘에 네 기를 세워라

청춘에 네 그 기를 지켜라

기 아래 네 그 청춘을 엮어라

오늘의 맹자(孟子)

11. 도(道)는 가까운 데에 있다

　　孟子曰: ｢道在爾而求諸遠, 事在易而求之難. 人人親其親̖ 長其長而天下平. ｣

맹자가 말했다.

“도는 가까운 데 있는데 먼 데서 구한다.

도를 실천하는 것은 쉬운데 어려운 것에서 찾으려고 한다.

사람마다 자기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면 천하는 태평하게 될 것이다.”

* 특별한 공로가 있는 분은 봉군(封君)의 은전을 내렸다. 이항복은 경주이씨라 오성(경주의 옛이름) 부원군(府院君), 한 등 낮추면 그냥 군(君)만을 봉하는데, 역관으로서 공이 있던 홍순언에게 강릉군(康陵君: 남양의 옛이름)을 주었던 것들이 그것이다.

죽은 뒤에 생전 공적을 평가해 내리는 칭호로 OO공이라는 것이 있다. 시법(諡法)이라고 하여 몸을 돌보지 않고 봉사했으면 충(忠), 재물에 욕심없이 청백하게 절개를 지켰으면 정(貞, 곧을 정), 합쳐서 충정공이라 하는 것이 이런 유다.

이런 정도의 분이라면 장사 때 임금의 명의로 예장(禮葬)을 내리게 되고, 그런 은전을 받으면 묘 앞에 장명등(長明燈)을 세우는 법이다. 아무리 큰 벼슬을 했더라도 석등이 안 꽂혔으면 무언가 말을 듣는 사람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리고 등의 창이 두 군데로 났느냐 사방으로 났느냐를 따지는 이가 있는데, 거기엔 아무런 차등이 없으니까 무의미한 얘기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20일 화요일

우리는 다른 미래를 택할 수 있다. <앨빈 토플러>

천적(天敵)

조병화

결국, 나의 천적은 나였던 거다.

오늘의 맹자(孟子)

12. 성실은 하늘의 도

　　孟子曰: ｢居下位而不獲於上, 民不可得而治也. 獲於上有道: 不信於友, 弗獲於上矣; 信於友有道: 事親弗悅, 弗信於友矣; 悅親有道: 反身不誠, 不悅於親矣; 誠身有道: 不明乎善, 不誠其身矣.

맹자가 말했다.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웃사람에게 신임을 얻지 못하면 백성을 다스릴 수 없다.

웃사람의 신임을 얻는 길은 벗들에게 신임을 받는 것이다.

벗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면 웃사람에게도 신임을 얻지 못하게 된다.

벗들에게 신임을 받는 데도 도가 있다.

부모를 섬기어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데도 도가 있다.

자신을 반성하여 성실하지 못하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

자신이 성실한 데도 도가 있으니 착한 일에 밝지 아니하면 그 자신의 몸이 성실치 못한 것이다.

* 한번은 성묘차 고향엘 갔는데, 버스에서 내리자 조카뻘 되는 청년이 쫒아와 인사를 한다.

“아저씨 내려오셔요?”

“오! 어머니 안녕하시냐? 할머니께서도 근력 좋으시고.... 형은 뭘하니?”

“형님께서는 장터에서 라디오방을 하고 계십니다.”

나는 그를 데리고 걸으면서 일러주었다.

“너한테는 소중한 형님이지만, 나로서 보면 너나 똑같은 조카야. 그럴 때는 상대방을 기준으로 ‘형은 장터에서 라디오방을 하고 있어요’해야 되는 거다.”

“아시다시피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벌어서 살림하기에 바쁘시고, 할머니는 그저 저희 형제 무병하게 자라는 것만 대견해하셨지, 언제 그런 거 일러주실 기회가 있어야죠.”

그는 나를 따라 걸으면서 많은 것들을 물었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21일 수요일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좀처럼 생각지 않고 언제나 없는 것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쇼펜하워>

시인 예수

용 혜 원

사나이 중의 사나이

예수 그리스도

혁명가도

철학자도

교육자도 아닌 사나이

한 순간쯤 되는 삶을

영원한 삶으로

열어준 멋진 사나이

하늘을 나는

새를 노래하고

들에 핀 백합화를 노래한

시인 예수

무엇 하나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무엇 하나

남기려 하지 않았다

사랑으로 사랑을 살다가

영원한 사랑으로

함께하는 사나이

온 세상을 사랑하며

온 세상을 노래하며

온 세상을 감싸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붉은 보혈의 꽃으로

활짝 피었다

시처럼 살다가 부활한

영원한 예수

시인 예수

사나이 중의 사나이

나를 사로잡는 시인 예수

오늘의 맹자(孟子)

是故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이런 까닭에 성실하다는 것은 하늘의 도이다.

성실해지기를 마음먹는 것이 사람의 도이다.

至誠而不動者, 未之有也; 不誠, 未有能動者也. ｣

정성이 지극한 데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성실치 아니한 데 남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학교에서 교감이라면 교장을 보좌하는 자리지만, 교무실에서는 어른이다. 어느날 오후 학교 후배인 선생 하나가 내 자리에 와 쭈뼛쭈뼛한다.

“좀 일찍 나갔으면 하는데요.”

“왜?”

“마누라가 아파서요.”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퉁명스럽게 그랬다.

“당신이 웬 마누라가 있어?”

“!?”

좌석에 있던 선생님들의 눈길이 우리에게로 쏠렸다.

“그러면 제 처를 뭐라고 해요?”

“‘아내, 내자(內子)’가 가장 정중한 표현이지만

약간 수수하게 ‘집의 사람, 안식구’ 정도면 괜찮고....

처(妻)라고는 하지 말아. 그건 상놈이나 쓰는 용어야.”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22일 목요일

위대한 사회란 사람들이 자기들 소유물의 양보다 자기들 목표의 질에 더 관심을 갖는 곳이다. <린든 베인스 존스>

꽃 피는 말

박노해

우리 시대에

가장 암울한 말이 있다면

남 하는 대로

나 하나쯤이야

세상이 그런데

우리 시대에

남은 희망의 말이 있다면

나 하나만이라도

내가 있음으로

내가 먼저

오늘의 맹자(孟子)

13. 백성을 어버이라 할 사람에게 몸을 의탁하라

　　孟子曰: ｢伯夷辟紂, 居北海之濱, 聞文王作, 興曰: ‘盍歸乎來! 吾聞西伯善養老者.’ 太公辟紂, 居東海之濱, 聞文王作, 興曰: ‘盍歸乎來! 吾聞西伯善養老者.’

맹자가 말했다.

“백이는 주(紂)를 피하여 북해 근처에 살았는데 문왕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가지 않으리요. 나는 서백이 늙은이를 잘 봉양해 주는 사람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태공도 주를 피해 동해 근처에 살았는데 문왕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 돌아가지 않으리요. 나는 그가 늙은이를 잘 봉양한다고 들었다’고 하였다.

* “무슨 물건이 생겨 부모님이 ‘이거 웬 거냐?’ 했을 때 ‘아비가 출장갔다 사온 거여요’해야지, ‘아범이 사왔어요’하는 건 가문이 들여다보여서 쓰지 않는 말이지.”

‘사모님’을 아무데나 쓰는데, 선생님의 부인이라야 사모님이지, 상대방 부인이면 모조리 사모님이고 아무나 보고 선생님이라니 딱한 노릇이다. 선생님의 어머님은 ‘노사모님’.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지음, 한길사, 1994>

9월 23일 금요일

은혜를 입은 자는 잊지 말아야 하고, 베푼 자는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피체 찰론>

다시

박노해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오늘의 맹자(孟子)

二老者, 天下之大老也, 而歸之, 是天下之父歸之也. 天下之父歸之, 其子焉往?

이 두 늙은이는 천하의 대로(大老)들인데 그들이 왔으니 이것은 천하의 어버이가 온 것이 된다. 온 천하의 어버이들이 왔으니 그 아이들이 어디를 가겠느냐.

諸侯有行文王之政者, 七年之內, 必爲政於天下矣. ｣

문왕의 정치를 행하는 제후들이 있다면 7년 안에 반드시 온 천하를 다스리게 될 것이다.”

* 형제들끼리 ‘우리 아버지’하면 당연한 얘기요, 가족들이 모여서 ‘우리집’, 동네 사람들끼리 ‘우리 동네’, 당연한 얘기다. 그런데 형을 말할 땐 ‘우리 형님’, 동생을 얘기할 때 ‘내 아우’다. ‘우리 동생’이라고 하면 친근감은 더하겠지만 어린 티가 난다.

충청도 분들은 ‘우리 집’ 할 것을 ‘우리들 집’이라고 한다. 철저하게 가족 중심으로 생겨난 말이다. ‘우리 마누라’를 영어로 직역해 보라. 웃기는 얘기다.

요새 와서

“내 집에 가서 한 잔 하세.”

하는 이가 있는데, 누가 제 소유 아니랄까보아 그러나? 웃음이 절로 난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종훈 지음, 한길사, 1994>

9월 26일 월요일

인간을 자유롭고 고상하게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소유에 대한 몰두이다. <버트런드 러셀>

너의 사랑은

조병화

하늘에서 밤마다 무수히

반짝이고 있는 별들이 제각기, 제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나무 줄기에서 무수히 피어나 있는

꽃송이들이 제각기 제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바람 부는 넓은 들판에서 무수히

생글생글 고개 흔들며 피어 있는 작은 들꽃들이

제각기, 제자리 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이 세상 만물들이 태어나서부터

제각기, 자기가 태어난 자리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듯이

아, 그렇게

너의 사랑은 이 어두운 우주에서

너만이 간직하고 있는 절대적인 빛이 아닌가.

오늘의 맹자(孟子)

14. 공자에게 버림받은 자

　　孟子曰: ｢求也爲季氏宰, 無能改於其德, 而賦粟倍他日. 孔子曰: ‘求非我徒也, 小子鳴鼓而攻之可也.’

맹자가 말했다.

“염구는 계씨의 재상이면서도 무능하여 악덕을 고쳐 주지 못하고 세곡을 배로 늘였다. 어느 날 공자가 말했다. ‘염구는 내 제자가 아니다. 너희들은 북을 울려 그의 비행을 공격해도 좋다.’

[임성삼; 공자가 제자를 공개적으로 탄핵한 유일한 예입니다.]

* 댁도 여러가지

“야! 그 여자 한번 멋지다.”

“임마! 조용히 해. 아무개댁이야.”

“얘, 네 댁 어디 갔니?”

이것은 남의 부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댁’이 뭘 잘한 것이 있어서 뻗대는 거요?”

이건 당신이라는 뜻이다.

“선생님 집이 어디셔요?”

이것은 잘못이 선생에게 있다. 그렇게 가르쳐 놨으니까.

어떤 양반이 모처럼 충청도 청풍(淸風: 지금은 제천군에 들어 있다) 현감(縣監)을 한자리 했는데, 임기를 채우고는 사표를 냈다. 주위에서 좀더 승진할 수 있는데 왜 그러느냐니까,

“택호가 하 좋아서.”

지방 고을이 원 노릇을 하면 그 고을 이름을 얹어서 택호로 삼는다. ‘청풍댁’, 확실히 좋은 이름이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27일 화요일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는 없다. <플랭클린>

전쟁

조병화

알라신이 잘들 살라고 준 검은 기름이

불붙은 수라장 속에서

알라신의 자손들과

하나님의 자손들이 다같이 불바다가 되어간다.

오늘의 맹자(孟子)

由此觀之, 君不行仁政而富之, 皆棄於孔子者也. 況於爲之强戰? 爭地以戰, 殺人盈野; 爭城以戰, 殺人盈城. 此所謂率土地而食人肉, 罪不容於死.

이것을 보더라도 임금이 어진 정치를 행하지 않는데도 그를 부유하게 해주는 자는 모두가 공자에게 버림받은 사람이 되었다.

하물며 임금을 위하여 싸움을 강제로 일으키고, 싸워서 땅을 빼앗느라고 죽은 사람의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싸워서 성을 빼앗느라고 죽은 사람의 시체가 성에 가득함에 있어서이랴.

이것은 토지가 사람의 고기를 먹게 하는 것과 같아서 그 죄는 사형으로서도 용서할 수 없다.

* 춘부장(椿府丈)

춘(椿)이라는 나무는 ‘장자’에 이르기를 팔천년으로 봄을 삼고 팔천년으로 가을을 삼는다 하였으니 무지하게 오래 사는 나무고, 부(府, 곳집 부)는 거처하는 곳, 그런 나무가 선 곳이면 주인도 오래 살 것이라, 상대방의 아버지를 높이는 말이다.

어머니를 훤당(萱堂), 삼촌을 완장(阮丈), 조카를 함씨(咸氏)라 하는 등은 알고만 있으면 됐지 통용할 시기는 지난 것 같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28일 수요일

지도자란 희망을 파는 상인이다. <나폴레옹>

사월이 머물 무렵

조병화

어느 시골도시

학교 교정에서 확, 쏟아져 나오는

소년, 소녀 들의 얼굴들에게서

봄은 내 가슴을 연다

어떻게 저렇게도 불그스레한 볼들이 있었을까.

갓 피어오르는 복숭아꽃, 아니면

살구꽃, 먼 산의 진달래, 벗꽃들, 처럼

흙바람 속에서도 봄은 소년, 소녀 들에게서

활짝, 피어오른다

생명은 저렇게도 모질고, 무서운 것

바람에 바람에 자라나는 저 소년, 소녀 들에게서

생명에 업힌 꿈들이

확, 확, 내게로 다가오며

할아버지, 우리와 같이 가세요, 이 봄은

하지만, 나는 이미 늙어서 이젠 기력이 없다

먼저 가거라, 그리고 자라라

무럭무럭, 하늘에 닿을도록

아무런 두려움 없이 자라라

그리하여 이 나라의 든든한 재목이 되어라

곧고, 정직하고, 건강한.

오늘의 맹자(孟子)

故善戰者服上刑, 連諸侯者次之, 辟草萊̖ 任土地者次之. ｣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극형에 처하고,

제후들을 연합하는 자는 다음 형벌에 처하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지를 백성에게 주어 세금을 거둬들이는 자는 그 다음의 형벌에 처해야 한다.

* 남의 장인더러는 聘丈(빙장), 岳丈(악장, 이 말은 향(響)이 좋질 않다), 渭陽丈(위양장: 이미 쓰는 이가 거의 없다). 영남지방데서는 자기 장인에게 이인칭으로 “빙장어른”을 일상에 흔히 쓴다. 기호지방에서는 맞대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어쩔 수 없이 꼭 불러야 되는 경우에는 “빙부(聘父)님”이 라면 되지 않을지? 많은 조언 바란다.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29일 목요일

지혜 없는 힘은 그 자체의 무게 때문에 쓰러진다. <호라티우스>

해마다 봄이 되면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 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쉼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둑에서

솟는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오늘의 맹자(孟子)

15. 눈은 마음의 창

　　孟子曰: ｢存乎人者, 莫良於眸子. 眸子不能掩其惡. 胸中正, 則眸子瞭焉; 胸中不正, 則眸子眊焉.

맹자가 말했다.

“사람을 보는 데 눈보다 더 솔직한 것은 없다. 눈은 악한 것을 감추지 못한다. 눈은 가슴속이 바르면 맑고 가슴속이 바르지 못하면 흐려진다.

聽其言也, 觀其眸子, 人焉廋哉? ｣

그 말을 듣고 그 눈을 보면 사람이 어떻게 숨기리요.”

* 어느 청년이 자기 소개를 한다.

“김 신자 권자 하는 어른의 자제분입니다.”

어른의 함자를 곧장 부르기 미안하여 휘(諱)할 줄 아는 사람이 저 자신을 자제분이라니, 그야말로 ‘아버님 대갈님에 검불님 붙으신’ 꼴이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김신권 씨가 저의 아버지십니다’ 정도 해도 좋을 것을...

옛날 같으면 ‘아비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고 전제했어야 되는 건데...

옆의 사람이 말한다.

“기본만 섰으면 장소에 걸맞게 얼마든 변통이 되는 것을... 뜨뜻한 자제일세.”

“뜨뜻하다니?”

“시원찮다는 얘기여!”

옛날엔 말끝마다 으레 ‘집안 욕되게 하지 말라’ ‘어미 아비 욕 먹이지 않게 하라’고들 하였다. 제대로 가르쳐 내놓았으면 왜 욕을 먹을꼬?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

9월 30일 금요일

책은 위대한 천재가 인류에게 남겨주는 유산이며, 그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손들에게 주는 선물로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달된다. <에디슨>

길

조병화

산을 넘어도 산

고개를 넘어도 고개

개울을 넘어도 개울

길은 그저 묵묵히 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 건가

사방 텅 비어 있는 우주

끝이 보이지 않는 길

길은 그저 묵묵히 이어진다.

길을 따라 나선 마음

기다리는 사람은 없어도

그저 길을 따라 가고픈 마음.

산을 넘어도 고개를 넘어도

개울을 넘어도 산을 넘어도

그저 묵묵한 길.

오늘의 맹자(孟子)

16. 조심성 있고 신중한 사람

　　孟子曰: ｢恭者不侮人, 儉者不奪人. 侮奪人之君, 惟恐不順焉, 惡得爲恭儉? 恭儉豈可以聲音笑貌爲哉? ｣

맹자가 말했다.

“공손한 사람은 남을 모욕하지 않고, 검소한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지 않는다.

백성들을 모욕하거나 재산을 빼앗는 임금은 오직 백성들이 순종하지 않는 일만 두려워한다. 이러고도 공손하고 검소하다 할 수 있으리오? 공손하고 신중하다고 하는 것은 온화한 음성이나 웃는 얼굴로 꾸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 “그 애가 내 서랑(壻郞)이오.”

어떤 점잖은 분이 내 동료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하기에 그 댁 사위 당자를 만나서 흉을 보아주었다. 자기 사위면 ‘사위’, 아니면 ‘사위놈’이지 제붙이에게는 당치 않은 호칭이다. 남의 사위를 가리킬 때는 ‘자네 서랑’해야 되지만 제 사위를 서랑이라 하다니..

<흥부의 작은마누라, 이훈종 지음, 한길사, 1994>